고립청년의 이야기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청춘(靑春)’입니다.
20대였던 저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친근하지 않았어요.
어르신들이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시며 “나 아직 이팔청춘이야.”라고 할 때
쓰는 단어로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나니, ‘청춘(靑春)’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그리고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보통 청춘의 시기를 10대 후반에서 20대에 걸치는 젊은 시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의 푸름을 연상하게 하는 ‘청춘(靑春)’.
하지만 안타깝게도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의 많은 청춘들이
봄이 아닌 혹독한 겨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겨울을 나는 청년들 중
제가 가장 가까이 만나고 있는 청년들이 고립청년입니다.
세상은 고립 청년을 사회적 관계, 사회적 지지 체계 등
사회적 자본이 모두 결핍된 청년이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은둔 청년은 이러한 고립 청년 중 외출 없이
제한된 공간에서단절된 채 살아가는 청년이라고 이야기하죠.
2023년 5월 국무조정실이 주관하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고립·은둔 청년의 규모가 무려 54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청춘들이 겨울을 경험하며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
쓰레기조차 내다 버리지 못하는 힘든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청년들의 취업 실패(24.1%)와 관계의 어려움(23.5%)은
더 이상 세상 속에서 자신이 할 일이 없다는
무기력감에 휩싸이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직무교육을 통해 고립·은둔 청년들을 처음 만났을 때,
저도 그들도 서로에게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청년들을 대하는 저의 마음과 태도는 이전과 매우 달라져 있었죠.
그 이유는 바로 저의 아이가 고립·은둔 청소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학기 초부터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설마설마했습니다.
하지만 불안은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아이로부터 집요한 괴롭힘과 따돌림이 시작되었고,
버티고 견디던 끝에 아이는 극도의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이는 그렇게 더 이상 방 밖을 나오지 않는
고립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어떻게 가만히 있었느냐고,
아이가 그렇게 될 때까지 방관했느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엄마가 자식을 방관만 하겠습니까?
다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대한민국
학교의 시스템은 여전히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고립 상태에 들어가면서 저희 가정에는 웃음이 사라져 갔습니다.
아이의 방을 뒤덮은 회색 커튼이 집어 삼킨 빛은
칠흑 같은 어둠이 되어
사랑하는 나의 아이를 삼키려 달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하루에 겨우 한 끼를 간신히 먹고,
이해할 수 없는 잠에 빠져들어 이불 밖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만 같아
가슴 철렁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타인으로 인해 겪게 된 비자발적인
외로움의 시간은 아이를 점점 병들게 했습니다.
그런 아이를 두고 생계를 위해
꾸역꾸역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제 모습이 한탄스러웠습니다.
시린 겨울이었고, 혹독한 겨울이었습니다.
한 달, 두 달 흐르는 시간만큼 제 인내심도 바닥을 쳤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화가 나서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너를 따돌린 아이들이 네 인생의 전부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 감정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눈에서 감당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제게 울부짖으며 소리쳤습니다.
“이 방에서 가장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라고!
그런데 나가면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나가?”
아이는 자기 하나쯤 사라져도 아무 상관도
없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아이의 표정과 말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당시 아이의 고통이 고스란히 떠 올라
눈물이 납니다.
아이의 고통은 엄마의 가슴에 피멍이 됩니다.
세상에 저와 아이 편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그 깊은 외로움의 기억이 잊힐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16살 소녀의 계절은 모두가 겨울이 되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겨울을 나며, 저에게 주어졌던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새초롬했지만 참 부지런하고 성실한 면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알람을 맞추고 등교를 준비하던 그 모습이 늘 대견했습니다.
아이는 문 밖을 나서기 전 항상 제게 인사를 건넸죠.
“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는 아이의 음성을 듣는 것이 행복이었음을,
제 눈을 마주 보며 식사를 나누던 그 순간들이 기쁨이었음을,
함께 드라마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었던,
모든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축복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언제쯤이면 그날이 올까,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라는
답이 없는 질문이 던져질 때마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내가 대신 아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밤새도록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텅 빈 눈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를
끌어안고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이 지옥이 언제쯤 끝날까?’
엄마의 마음속 절규는
아이의 마음에 온전히 닿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옷도 갈아입기 전에 아이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매일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살아 있어 주어 고맙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는 제게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했지만,
엄마에게는, 가족에게는 너의 살아있음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의미가 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는 없다.”
엄마는 기다립니다.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기다림이 바로 엄마인 제가 아이에게
다정한 한 사람이 되어주는 길이니까요.
불안한 날들이 지속되었지만,
한편으로 제 마음은 감사했습니다.
아이가 제 옆에 살아 숨 쉬고 있었으니까요.
기대를 내려놓고 아이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날들은 그저 곁에 머무르기만 하고,
어떤 날은 너의 살아있음이
나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지 전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이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기다림이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기다림은 제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제게 가장 힘이 된 건
제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라도 해야했습니다.
간절했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습니다.
아이를 위한 기도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의지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이의 겨울을 기도로 버티며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던가요?
아이가 제게 “엄마, 나 오늘은 엄마랑 밥 먹고 싶어.”라며
조심히 방 밖을 나왔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겠지만,
제게 그 날은 특별한 변화가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부터 아이는 서서히 거실에 나와
함께 식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나가 다시 문을 열고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던 동생의 진심이 통했는지,
아이는 동생이 내민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생의 손을 잡고
집 앞 편의점에 가는 작은 걸음을 시작으로
현관문을 나서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제 회사에 함께 출근하며
다시금 아침을 깨우는 연습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아이를 힘들게 하던 아이들 모두가
학교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아직 내키지는 않지만 다시 학교를 다녀 보겠다고 했습니다.
처음 한 달은 1, 2교시만 하고 돌아왔고,
그다음 달은 4교시까지,
그리고 그다음 달은 점심까지 먹고 하교하기.
드디어 아이는 1학기가 끝날 무렵,
학교의 모든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저희 아이가 혹독한 겨울을 나고 온전한 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일으킨 따스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가족의 사랑도 있었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
아이에게는 선생님이라는 다정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려 들 것 같은 공포가 올라와
공황 증상이 나타나 견디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런 아이의 마음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라고
적극적으로 공감해 주신 선생님.
선생님의 다정함은 공감으로 끝나지 않았고,
아이가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과 함께
식사할 친구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공황 증상이 시작될 때면
아이 곁엔 항상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사람을 의심하던 아이는
그 배려가 지속적이고 일관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전하다.”는
마음을 온전히 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리고 외롭던 겨울에 따스한 다정함이 스며들자,
비로소 온전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삶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던
아이의 겨울은 저의 겨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겪은 이 겨울은
저로 하여금 고립 청년들의 내적 상태와 환경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머리로만 공감하던 제가 이제는 마음으로
공감하는 진실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들의 겨울에 다정한
한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청년들이 서서히 마음을 여는 모습을 보며 확신합니다.
겨울을 나는 은둔·고립 청년들에게 누군가는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겨울에 갇힌 것이 아니라 겨울을 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겨울에 있는 사람들은 그 겨울이 영원할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청년들의 고립을 단순히 정신력의 문제로만
판단하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시금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안전지대를 만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안전한 사람, 안전한 공간입니다.
겨울을 끝내고
저들의 청춘이 다시 피어나도록
청년들과 함께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