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하기는 나에게 큰 즐거움이다. 때로는 상대방이 갖고 싶었던 것을, 또 때로는 상대에게 쏙 어울리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상대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선물할 생각을 하면 짜릿함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선물할 계기가 생기면 거의 한 달 전쯤부터 머릿속 서랍에 저장해서 두고두고 꺼내보며 오랫동안 고민해 품목을 결정하곤 한다.
부산에 내려온 뒤 나름 스토리를 담아 부산 특산물로다가 명절선물을 꾸려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고래사어묵을 시작으로 기장 미역을 넘어 부산만의 색깔이 담긴 무언가를 찾던 중 뜻밖에 마주한 부산의 맛이 있었으니, 바로 '명란'이다. 사실 먹을 줄만 알았지 명란이 부산의 음식인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명란 역사의 첫 장이 바로 이곳 부산에서 쓰였단다.
샘솟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어느 휴일 명란 찾아 부산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그저 내 안의 E가 참지 못했을 뿐이라고 답할 수밖에.
나의 명랑한 명란이야기, 가보자고!
명란의 시작, 부산 초량동
언젠가 동구 초량동에 '명란 브랜드하우스'라는 문화공간이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곳을 기억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명란을 활용한 요리를 파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한번 들은 식당이름 잘 안 까먹음) 어느 날 마음속에 콕 박힌 부산의 명란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무작정 초량동 그곳으로 향했다.
일전에 전통주를 사러 찾았던 산복도로 168계단 종점에 위치한 깔끔한 건물이 바로 '명란 브랜드하우스'다. 이곳은 층층마다 명란을 주제로 판매장 및 식당 등을 운영하고 있다. 종일 굶었던 터라 바로 명란 오일 파스타를 주문하고 앉았다. 평일이라 손님이 적어 조용한 실내를 뒤로하고 창 밖의 부산항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경사 따라 층층이 쌓인 삶의 흔적 끝에 바다가 걸쳐있는 독특한 도시풍경을 보자니 해운대나 광안리와 같은 여느 모래사장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부산다움'이 한눈에 느껴졌다.
캬! 이게 부산이지 마 부산아잉교!
호로록.
나 홀로 4층 조용한 창가에 앉아 명란 파스타 한 입 오물거리며 부산 명란의 역사를 담은 브로슈어를 읽어 내려갔다. 백여 년 전쯤, 부산 초량시장 입구에 물류창고인 '남선창고'가 들어섰단다. 창고는 함흥에서 잡힌 명태가 전국에 보내지기 전 잠깐 모이던, 말하자면 명태 허브쯤 되었는데 그래서 창고는 '명태고방'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자연스레 이곳 초량시장에서 명태의 알로 만든 명란젓을 팔곤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초량에서 태어나 명란을 먹고 자란 일본인이 광복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명란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온 것이라고 한다. 입 속의 짭조롬한 명란이 톡톡 터지는데, 명란의 시발점이 이곳 부산이라니 어쩐지 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달까.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격이 저렴해서 가볍게 한끼 즐기기 좋다!
모든 명란은 감천항을 통한다
'명란 브랜드연구소'에서 파스타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서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감천항.이 모든 명란 찾아 삼만리가 사실 부산만의 특색 있는 선물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 시작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부산 선물', '부산 특산물' 따위의 키워드로 한참을 검색하다 보니 알고리즘이 부산 명란을 추천하는 것이었다.
명란의 기원 외에도 오늘날 우리가 먹는 명란이 모두 부산 감천항을 통해 들어온단다. 무슨 말인고 하니 명란의 어머니쯤 되는 명태가 예전에는 우리 바다에서 흔하게 잡히는 대표 생선이었으나 그 씨가 말라 이제는 찾기 힘든 귀한 몸이 되었단다. 그래서 미국과 러시아가 저 멀리 오호츠크와 베링 해에서 잡아오는데, 그중에서도 러시아산 명태에서 나오는 명란은 이곳 감천항에서 경매를 통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사간다고 한다. 미국산 명란은 일본이 전량 수입하여 결국 우리 밥상에 오르는 명란의 본적은 거의 전부가 러시아라고 하니, 우리가 먹는 모든 명란은 감천항 한 길로 통하는 셈이다.
내가 아는 오호츠크의 전부... 무한도전 오호츠크 편...
우리 바다에 명태가 사라진 슬픈 이야기는 뒤로 한 채, 러시아에서 태어난 R-명태가 먼바다를 건너 부산의 항구로 들어와 K-명란으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는 썩 흥미롭다. '명태스바시바'로 태어나 '부산 김명란' 쯤으로 탈바꿈해 다시금 '명란'과 '멘타이코'로 두세 번 다시 태어나는 운명이니깐.이쯤 되면 감천항을 따라 쭈르륵 늘어선 냉동창고 속 어딘가에 잠깐 잠을 청하고 있을 '김명란'씨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감천항은 그리하여 국제 수산식품 클러스터로도 자리를 잡았지만, 곳곳에 숨은 명란 가공공장으로도 알음알음 알려지고 있다. K-명란의 고향답게 감천항 인근에는 명란으로 잘 알려진 '덕화명란'(감천항을 바라보는 부산 송도에 위치)은 물론, 내가 방문했던 깜찍 괴랄한 명란캐릭터가 취향저격인 '부산허명란' 등 명란을 판매하는 가공업체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허명란을 찾았을때 명란바게트는 아쉽게도 먹을 수 없었지만 저 말도 안되는 명란캐릭터가 너무 취향저격이라 명란을 사옴(..??)
하루 동안 부산 명란을 찾고자 명랑하게 명란 탐험을 떠난 결과, 명란은 역사부터 오늘날 유통 통로가 되기까지 가히 부산의 맛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부산음식 하면 떠올리는 돼지국밥이나 밀면 외에도 바삭바삭 군만두를 찾았던 작년의 희열을 떠올리며 올해에는 첫걸음에 벌써 명란을 마주했으니 쩝쩝박사로서 어깨에 제법 힘이 들어간다. 아마도 다가올 설 명절 가족친구들에게는 부산의 명란으로 부산에서의 마음을 보내볼까 한다.
아참. 글에는 진정성이 중요하다 판단되어 저녁에 열심히 운동하고서 돌아와 명란젓 무침에 밥 두 그릇을 깔꼼하게 비웠다. 오늘만큼은 진정성 핑계 삼아 다이어트 하루쯤(?) 스리슬쩍 덮어둔다 내가!
무한도전 오호츠크해 레전드 짤을 끝으로, 여러분도 역시 긍정의 힘 솟아나시길 바랍니다 저도 노력해볼게요!!(악깡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