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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토피아, 정신과 15

by 씀씀


매일 사직서를 품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에게, 기어코 디데이가 오고 만다면 이런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음에도 드라마와 광고에서 유체이탈을 경험할 느낌으로 봐와서 익히 잘 아는 전개.


#1. 회사, 사무실 안. 낮. <사직서의 등장>

품고만 다녔던 영롱한 것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왼쪽 가슴팍 안에 잠들어있던 하얀 봉투는 거침없는 주인공의 손에 제 한 몸 맡긴다. 이윽고 유려한 포물선으 그리며 상사 책상 위에 톽. or 상사 얼굴에 휘리릭 톽! 민첩하고 화려하게 존재감을 뽐낸다.


"이 회사야 죄가 없으니 당연히 번영하고, 나에게서 업보 많이 쌓은 그쪽도 부디 만수무강 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예고편이었습니다. 상하복종. 이제부터가 쇼타임입니다. 인과응보"




내 PC. 어느 폴더의 폴더를 타고 타고 들어가면 마침내 마주하는 정신과 진단서. 나 역시 기어이 디데이, 그러니까 이 비밀스런 통원 치료가 더는 힘 들어 안 되겠을 때. 또는 빅모씨가 나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또 개떡 같이 자극할 때 등과 같은 극한 현실을 체험하게 되면, 드라마에서처럼 해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져본 적, 나아가 구체화 해 본 적이 있다.


그날이 오면 나는, 진단서를 출력하여 구내식당 출입문에 톽! 붙이겠노라. 몇 가지 첨언과 함께.

1. 헤치지 않습니다

2. 여러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3. 개를 싫어하진 않으나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편견, 선입견 저한테 보내지 마십쇼

4. 시력 좌 1.2, 우 1.0입니다.

저는 색안경 낄 일 없으니 귀하도 끼지 마십시오

5. 이래서 결혼 못 한 것도 아니고

결혼 못 해서 이런 것도 아닙니다

6. 사유가 알고 싶으신 분,

뒤에서 공개적으로 궁금해하지 마시고

앞에서 개인적으로 연락 주십시오




정신과에 처음 가던 날. 병원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정작 헤맨 건 병원 건물 엘리베이터 안. 무려 2,3초 간의 엄청난 버벅임이었다. 가려는 층의 버튼을 누르기까지 우왕좌왕, 나도 처음 보는 내 모습. 몇 층인지 몰라 헤맸을 리는 당연히 없는 거고. 내가 몇 층을 누르는지, 그 층에 정신과가 있는 걸 누가 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팔자라는데 난 참 팔자 한 번 기구하구나 싶은 걱정들.


심장은 뛰지 손가락은 떨리지. 그걸로도 정신 없는데 눈도 거들어야 했다.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층별 안내에서 5층에 정신과 아닌 어떤 병원들이 있는지 빠르게 살펴야 했으니까. 아싸? 치과와 내과가 있구나. 다행?이다. 여보세요 여러분, 나는 말이죠. 치과나 내과에 내원하기 위해 5층을 누른 것이에요.


… 아이고. 씀씀아.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타인은 타인에게 생각보다 관심이 없단다. 어쩌면 서운하리 만큼. 어떻게는 매정하다싶을 만큼. 그 엘리베이터 안에 너가 몇 층을 누르고 그 층엔 뭐가 있고, 너가 그 층에 내려서 어디로 갔는지를 알고 싶어했거나 알았거나 알아둘 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야. 심한 말로, 엘리베이터 안 CCTV에마저도... 너만 사각지대였을 수 있어.




내가 정신과를 간다고? 라는 생각에 스스로 그 문턱을 넘기 힘들었다면, 정신과를 다닌다고 하면 뭐라고 생각을 할까? 라는 걱정으로 내 문제를 함께 하기 힘들었다.


전자건 후자건 모두 정신과에 대한 여전한 낡은 인식(나부터도 그랬고)과 나에 대한 타인의 인식. 결국 그 놈에 평가란 것들이 안팎으로 내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마음이 병든 애가 그걸 치료해주는 병원에 가는 것을 무슨 이유로든 걱정한다니 이런 모순이?


것도 그래. 정신과 다닌다고 안 좋게 생각하고, 정신과 안 다닌다고 좋게 생각해? 아메바도 안 그럴 거야. 물론 아메바도 안 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긴 있어. 겉만 얽힌 사람들. 그치만 속까지 얽히고 설킨 사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는 걸.


"나 정신과 다녀왔어"


나는 열 명에게 말했고, 열 가지의 응원을 들었다.


잘 했어. 고생했어. 유명한 데야? 잘 알아보고 가지. 진작 말하지 같이 가게. 이제 편해질 일만 남았어. 니가 한 일 중에 제일 장하다. 가보니 세상 별 거 아니지? 빅은 진짜 크게 혼 날거야. 뭐 먹고 싶어? 용기내줘서 고마워.


길게까지 오래까지 볼 것도 없이, 나를 응원할 사람과 나를 흉 볼 사람은 이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으로 갈릴 게 뻔했다.


나를 응원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미괄식으로.

"... ... ... ... 그래서 정신과를 가게 됐어“


나를 음해하고 웃음거리로 만들 사람은 두괄식으로.

"정신과 다닌대! 이유? 몰라~"




내일은 건강검진을 하기로 한 날. 큰 맘 먹고 종합검진을 예약했다. 추가 항목 중에는 뇌 ct를 선택했다. 인간 신체의 70프로 이상이 수분이라는 건 옛날 얘기고 지금은 스트레스로 바꿔야 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스트레스에게 매일 쥐어잡혀 사는데, 머리가 안 미쳤을 리 없을 것 같다는 큰일 날 소리가 이유였다. 내 뇌세포들한테 미안해서. 얘들아 내가 너네 맨날 힘들게만 하는데, 늘 생각하고 있다는 걸 이렇게라도 알려주고 싶은 한껏 변태적 감성적인 풀이가 두 번째 이유였고.


나는 스트레스도 싫고 스트레스를 주는 대상도 싫지만, 그 중 가장 속상한 건 이렇게 스트레스에 취약한 내 자신이다. 왜 다른 건 다 싫으면서 나 자신은 속상하다고 하냐고 하면, 나까지 나를 싫어하면 안 되니까라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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