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 남 주면 좋겠다

by 씀씀


모름지기 배워서 남 줘야 배운 보람도 있고 배운 값도 하는 거다. 말이 적나라하니, 낭만 면에선 낮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문장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사실인 데다 우리 사는 일이 그런 걸.


배워서 남을 줘야 돈이 된다. 나 배운 걸 잘 전하고 나눠야 밥을 먹고 산다. 자기만족, 개발을 위한 배움도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그게 백프로 본인 정신적 만족만을 위한 과업일까 의문도 든다. 한구석엔 그 배움들이 세상에 본인을 드러낼 때 더할 나위 없이 그럴싸한 재료, 가장 쉬운 단초가 돼줄 거란 계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녕 뒤뜰 장독대에 담아 두고 혼자 알겠다고 시간, 에너지, 돈을 들이면서 이런저런 것을 배워두는 이는 희귀할 테니 말이다.


사실 다 떠나 그 전에, 그만치 배운 자라면 아무리 자기가 티 안 내고 본인의 것으로만 두고 살려해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 세상이 모를 수가 없다. 아우라든 그림자든 뭐가 달라도 다를 텐데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게 세상 눈에 띈 사람의 배움, 경험, 능력은 다른 의미의 공공재가 되기 마련이니. 이 또한 배워서 남 주는 일인 것이고. 여기에 역시 마땅한 대가가 지불됨을 고려해 보면 배움은 남과 나누면 돈이 되는 시스템인 것이 분명해진다.


왜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성의 있게도 하느냐. 간단하다. 내가 퇴사 또는 퇴직 후를 걱정하여 무얼 배우겠다고 팔 걷어붙였기 때문.


해가 바뀐 이벤트쯤은 나 몰라라 고요한 세상에서, 내 세상만 요동 친다. 나이 앞숫자가 3에서 4로 바뀌었다며, 나의 세상은 하늘과 땅이 뒤바뀔 것처럼 소란하고 을씨년하다.


40이라. 그건 헐레벌레 청춘은 다 썼다는 건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 시절은 무엇으로 어디에 남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내 앞날도 마찬가지. 이건 뭐 인생 가시거리가 하루도 안 되는 느낌이다.


사는 일에 게을렀다고는 생각 않는다. 꾀부린 적도 없다. 다만, 갖은 노력에는 덜 치열했고 최상의 만족엔 너그러웠으며 인생을 시기마다 분할해 계산하는 일엔 치밀하지 못했다고 자아성찰 한다.


40 땡한 어느 날. 불현듯 생각했다. 직장이 내 밥줄이고 브런치가 내 숨구멍이면, 이 둘 말고도 나 살릴 하나가 더 있어야겠다고. 가진 게 없으니 선택은 뻔했다.


만학도가 되기로 했다. 공부랑 쌓은 담이 고산병 올 정도지만, 내가 쌓았으니 무너트리는 데에도 소질이 있을 거다. 남들은 일찌감치 몇 개씩 하는 공부. 이제 다시 겨우 흉내 내는 게 뭐 대수라고. 초장부터 유난이다 싶지만, 40대 됐다고 쫄아있는 게 짠하기도 귀엽기도 하고, 살아보겠다고 아동바동하는 꼴이 대견하기도 해서 이렇게나마 응원 한 사바리 해준다.


하나 배워서는 겨우 퍼즐 한 조각 가진 거나 다름없으니, 생각한 바를 이루려면 꾸준해야 할 거란 걸 안다. 배우고 났을 때, 내가 얻은 걸 남에게 주고 살 수 있을지는 미지수고. 배운 걸로 돈도 벌고 밥도 먹고 산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건 살다 보면 알 일. 당장 내가 알 수 있는 건 지금 배우는 것들을 내 50대에는 줄 수 있을 거라는 것.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배울만 하다.


갓 40대 스타트 끊은 신입은 지금 좀 설렌다. 50대는 되게 꽉 들어찬 사람이 되어 맞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럴 준비로 내 앞으로의 십 년 알뜰히 써나갈 생각에.


는 개뿔. 너 이걸 30대 때 안 하고 뭐 했냐. 옛날부터 있었던데. 십 년을 까먹고 와서 잘하는 짓이다 인간아. 이제 노빠꾸다. 단디 하자.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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