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 처음 보곤, 하다 하다 별 요상한 대회를 다 하는구먼 했었는데. 역시 사람도 인생도 속단은 금물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요상한 타이틀을 겨루는 자리가 작금의 내겐 마치 유토피아요,우승자는 꼭 뮤즈처럼 와닿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언제고 듣기를, 인간은 죽을 때까지 뇌의 3% 정도밖에 쓰지 못한다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대체 어쩌자고 2% 정도를 온갖 짐작과 해석 같이 하등 생산성 없는 영역에 쓰고 있는 것일까.모르는 새 심리학 박사 학위라도 딴 건가.아님사회학자? 철학자?
놉! 그저 그 달 벌어 그 달사는 월급쟁이.고로 이건 안 봐도 비디오인 게, 생각하는 거야 돈 안 드니까 밤낮없이 허고 또 허고 해재꼈다는 결론 밖엔 없음이다. 질러놓은 카드값이 삶의 원동력인 월급쟁이에게 1인분 이상의 사색은 독인지도 모르고묻고 따블로 가버린 것.
그러고 보면 사색인지 생각인지 하는 걔도 좀비겁하다.누울 자릴 보고 발을 뻗어야지. 어쩌자고 매일존버하느라 한 뼘의 여유도없는'을'들의머릿속에만열나게오는지.강약약강. 아무래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임에 틀림없다.
.....라곤하지만 이 인간세상의 생태계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힘을 빼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현대인의 자세이자 매너.
인정이 빠른 편인 나는,
고로, 한쪽에선 멍 때리기 대회와 발상을 반대로 하는대회도 개최돼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바쁘다 바빠현대사회에서 심신을 쉬어가는 게 중요한 만큼, 그러지 못해 여전히 고통인 이들의 이야기도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멍 안(못) 때리기' 대회 같이, 뇌를 1초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틀을 마련해 주신다면, 나를 비롯한 나의 동지누군가는 그 타이틀로나마 본인의 정서적 고단함을 세상 어디에서든 어필할 수 있을 텐데.
과연 번아웃이 될까 넌 아웃이 될까.
설문을 작성하려 자리에 앉았다. 이름을 쓰고, 내원일을 쓰고 마치 설문 표지를 넘기는 일이 꼭 인생을 건 대단한 시험지의 첫 장을 여는 것처럼, 진지하다 못해 엄숙했다. 그리곤 표지를 넘기자마자 터지는 실소.
?? 아니 마음과 설문지 첫 장 맨 꼭대기에 왜 우리 회사 약자가 쓰여있지? 몰래카메라일 리는 없고일종의 퀘스트 같은 건가.
'이런 자극쯤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어야 하는 것이 마음 건강의 첫 관문입니다. 나숙녀 님, 회사 이름쯤은무덤덤히무시하며설문을 완료하세요' 하는?
그러니까 이게 무슨 그림이냐면, 그것은 우리 회사명이'홍길동', 영문명은 'Hong Gil Dong'이라고 했을 때, 설문지 맨 첫 장 위에 본문의 세 배 크기로, 볼드처리 빡! 해서는
H.G.D
라고 쓰여 있는 황당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었다. 홍길동 때문에(정확히는 그 안의특정 족속들) 때문에 가진 고민 끝에 온 곳에서, 홍길동 이름을 마주하다니.
어이가 없어 대체 우리 회사 약자가 여기서 왜 등장하는지 찾아보니, 그 말 뜻이 뭐 불안척도 평가 모시기라나?
상당히 거시기한 기분으로 시작한 설문은, 내가 그간 MBTI를 비롯하여 해온 그것들과는 다르게 나라는 인간, 내 인생을 총칭하여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 1개월~3개월 내의 경험과 생각만을 바탕으로 체크하도록 돼있었다.
쉽겠다 싶었지만 더 애를 먹었으니. 과장 조금 보태어 당장 어제 먹은 저녁도, 어제 입은 옷도 기억이 안 날 때가 많은 마당에 최근 3개월이라... 더욱이 날 괴롭힌 인물과 그로 인한 데이터들은 곱씹어질 대로 곱씹어져 이게 최근의 일인지, 아주 오래 묵혀온 일인지 분간도 어려운터.
결국 심사에 숙고까지 거듭하며 임한 결과, 열 장 정도의 설문에 걸린 시간은 무려 30분 남짓. 훌러덩훌러덩 넘길 거라 여긴내 발목을 잡은 것은 보기 간 경중의 차이였다.대체 그렇다와 약간 그렇다, 매우 그렇다의 기준이 무엇인지 나만 모르는 거냐고.
이를테면 오늘 마음과에서 설문의 경우, 몇 가지 문항을 빼곤 죄다 '매우 그렇다'인 것만 같은데, 내 상태가 그렇게나 초극한으로 내몰려진 것은 아니라는 걸 나도 알 것 같아 고민이었다. 문항마다 인정, 약간의 인정, 매우 강한 인정 사이에 친절한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참 좋을 것을. 타인이든 본인이든 사람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이럴 때 챗GPT는 무어라 할까.
- 설문하신 걸 보니,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우울도 수치가 너무 높고, 강박도 있으신 거 같고. 조금 더 심해지면 공황도 올 수 있는 그런 정도예요. 자신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 이런 것도 잘 안 보이고. 내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시네요. 불안도 굉장히 높고. 언제부터 이러셨어요?
"이 회사 오고 나서요. 회사 탓을 하는 건 아니고, 회사가 문제도 아닌데 일단 이 회사 들어오고 나서는 계속 그 기미는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4년 전쯤부터 좀 많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불안했고, 그래도 마음과는 정말 꿈에도 생각 안 했는데, 이번 여름에 좀 일이 있고 나선 일상이 제대로 굴러가질 않아서. 저 좀 편해지고 싶어 왔어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래요? 일? 사람? 아니면 힘든 뭐 다른 게 있을까요?
"사람이요. 회사도 좋고 일도 그래요. 물론 회사에 괜찮으신 분들도 많은데, 제 가까이에 너무 힘든 사람이 있는데 이제 제가 한계인 것 같은..."
-번아웃은 확실히 아니네요. 그런 종류는 아닌 거 같고. 사람이 힘들다라... 어떤 일일까요?"
원래도 좀 낯을 가리는 편. 하다 하다 병원에서도 낯을 가리는 나는, 본래도 진료를 보러 갈 때면 증상에 대해 혼자 열심히도 축약해 말하곤 했다. 내 입장에서야 병원에 올 만큼 날 힘들게 하는 증상들이라지만, 어차피 아무리 장황히, 소상하게 늘어나봤자 감기, 몸살과 같이, 꼭 '재채기'처럼 짧고 가는 질병으로 정리되기 일쑤라는 학습의 결과였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껏은 중요하지 않았다. 백 년 천년을 그래 왔다 하더라도 여기선 달라야 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우울증 류의 질환들로 퉁- 쳐질 확률이 높다지만 그 퉁이 뭘로 쳐지는지 나는 반드시 알아야 했다.
"아... 그 일들을 제가 다 말하기는 어렵고... 일단 여름에 어떤 일이었냐면"
신기한 일이었다. 원장석 앞에 놓인, 빳빳히 날 선 모서리의 사각형이눈에 띈 것도 순간. 이내 내 손에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