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만년 차장 한만운 개납 생존기 - 2
저녁을 먹고 나자 바이올린 가방을 들고 딸아이가 귀가했다. 아빠는 본체만체하고 엄마에게 가서 정연이는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하였다.
“아빠한테 인사했어?” 아내가 잔소리를 하자 그제야 “아빠 왔어.”하며 형식적인 인사를 한다.
“밥 먹고 영어 공부한다.”
“아이 피곤한데 안 하면 안 돼.”
학원비를 아낄 요량으로 나와 아내는 영어와 수학을 전담하며 정연이에게 과외를 했다. 나는 학창 시절 했던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를 기억하며 문법과 독해를 위주로 성문 기초 영문법을 가르쳤다. 말하기와 듣기는 인터넷 강의로 보충하고 수학은 중학교 시간제 사회교사인 아내가 중등 수학 지도사 과정을 수료하고 직접 정연이를 지도했다.
“다른 애들은 다 학원 다니며 열심히 할 텐데 너만 안 하면 나중에 아빠처럼 직장에서 갑질 당하고 괴롭다고 했잖아. 지금 고생하면 나중에 윗자리에서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 공부하자. 응”
내가 이렇게 달래자 정연이는 마지못해 책상에 앉았다. 교재는 바라보지 않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정연이에게 공부에 집중하라며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학원을 보내자니까 굳이 본인이 가르치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자기 자식 가르치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인 줄 모르고...”
아내의 푸념에 나는 그래도 학원비 절약하는 재미로 열심히 교재를 보고 떠들어댄다.
“부정사만을 목적어로 취하는 동사는 소망과 결정의 의미를 가진 want, hope, decide 등이 있고 동명사만을 목적어로 취하는 동사에는 enjoy, escape, deny가 있어. 대부분의 동사는 부정사와 동명사 둘 다 목적어로 취할 수 있지.”
정연이는 따분한 듯 계속 하품을 하고 그런 모습에 나도 힘이 안 났다. 정연이라도 좋은 대학에 보내 고시를 통해 고위직으로 입사하는 모습을 보는 게 나의 꿈이었는데 그런 대리만족의 희망도 점점 사라지고 지금은 학원비나 절약해보자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강북 세무서 개인 납세과에 출근하자 내 자리는 말이 차석 자리지 사무실 중앙에 위치하여 민원인들과 직원들이 수시로 내 자리 쪽으로 오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반동득 과장은 나를 보고 악수를 한 후에는 부가가치세 신고창구에 내려간다고 나중에 직원들과 인사를 하자고 하였다. 이미 부가가치세 신고가 시작된 후 신고창구가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직원들은 모두 신고창구에 동원되고 나는 가자마자 직원들이 모두 전화 착신을 차석인 나에게 전환시켜 놓아 하루 종일 전화를 받아야 했다.
“거기 강북 세무서 개인 납세과죠?”
“네, 그런데요.”
“인터넷으로 부가가치세 신고를 하려고 하는 데 뭐 이렇게 깔라는 게 많아요. 액티브엑스 깔고 보안 프로그램 깔고 공인인증서 다운로드하고 하루 종일 프로그램 설치하다가 날 새겠어요.”
“죄송합니다. 정 설치가 어려우시면 가까운 세무서에 신고창구가 마련되어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내서 방문하여 신고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그럴 시간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신고하겠어요. 정말 짜증 나네.”
하루 종일 이런 전화를 받다 보니 나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개인 2팀 장인 김인재 팀장은 전화받는 것을 도와주지는 않고 개인적인 전화만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차장님 업무 매뉴얼 공부 좀 하세요. 전화 응대를 잘하셔야죠. 직원들은 모두 신고창구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차장이 돼서 그런 거라도 도와주셔야죠.”하며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1팀 차석인 진금덕 차장은 자기 팀은 소득신고 총괄이라고 하면서 나의 이런 전화 상담을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신문기사만 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계속 전화가 울려 화장실 갈 시간도 없는데 상담 창구에서 민원 때문에 잠시 사무실에 올라온 여직원이 전화기 모양의 버튼과 전환 버튼을 동시에 누르면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다고 가르쳐주었다. 그 기능을 아는 순간 나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 방법을 가르쳐 준 여직원이 천사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