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기판의 졸이었다

(단편소설) 만년 차장 한만운 개납 생존기 - 1

by 하기

만년 차장 한만운 개납 생존기


* 이 소설은 일선 세무서 부가가치세과와 개인납세과에 근무했던 자전적 경험이 모티브가 되어 쓰인 소설입니다. 모든 직원들이 고생이 많지만 개인 납세과의 특성상 많은 민원인을 상대로 하는 어려움이 있던 기억들이 하나의 소설이 되어 저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1. 나는 장기판의 졸이었다.


나는 장기판의 졸이었다. 왕은 고사하고 화려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차포도 아니었다. 실속 있게 전진과 후진을 하는 마상의 수비력도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는 왕의 호위무사 역할도 할 수 없는 나는 총알받이로 적진으로 전진만 하다가 잡아 먹히는 영원한 호구였다.

매년 1월 초가 되면 세무서에는 인사의 시즌이 돌아온다. 12월부터 직원들은 인맥과 학연, 지연, 종교의 인연까지 동원하여 본인들이 원하는 자리로 가기 위하여 작업을 하였다. 그들이 모두 원하는 자리로 이동이 결정되면 누구도 원하지 않고 탐내지 않는 자리가 나에게 배정되었으니 그 자리는 언제나 개인 납세과의 차석 자리였다. 동기들은 나와 같은 6급이지만 모두 팀장 자리를 꽤 차고앉아 있는데 나만 6급 주사로 승진한 후 한 번도 팀장을 하지 못 하고 10년째 내리 차석만 하는 중이었다.

“한만운 차장님 축하드려요. 강북 세무서 개인 납세과 2팀 차장으로 발령이 나셨습니다.” 을지로 세무서 개인납세과장 임요한은 나에게 말했다. 다른 직원들이 모두 자신의 발령지를 어제 벌써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내부망에 오른 정식발령 통지를 보고서야 발령이 난 곳을 알게 되었다. 그 화면을 보고 과장도 생색을 내듯 축하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2년 동안 무능력한 차장 챙겨주시느라 과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나는 나보다 5살이나 어린 과장에게 굽신거리며 형식적인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발령지로 부임을 하기 위하여 책상을 정리하여 비품과 소지품을 모두 박스에 담아 나의 베르나 승용차에 실었다. 동료들이 모두 퇴근하여 썰렁한 사무실에서 혼자 남아 믹스커피 한 잔을 마셨다. 창문 밖으로 앙상한 가지에 걸려있던 나뭇잎 하나가 매운 겨울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15년 된 베르나를 타고 나는 집으로 귀가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나에게 물었다.

“자기 이번에 어디로 발령 났어. 이번엔 팀장이지?”

“응, 강북 세무서 개인 납세과 2팀으로 발령이 났어. 그런데 선임들이 많아서 이번에도 차장으로 발령 난 것 같아.”

“아니 팀장이 무슨 대단한 감투라고 이번에도 차장이야. 그러게 내가 이번에는 인사이동 전에 관리자들에게 인사 좀 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팀장 자리 하나 부탁하라고. 하여튼 마누라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데 똥고집 부리다가 잘 됐지 뭐야.”

연신 핀잔을 주는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며 나는 밥상에 앉았다. 밥상에는 고등어조림과 소고기 미역국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정연이는?”

“다음 주에 오케스트라 정기 연주회 때문에 음악실에서 바이올린 연주 연습한 후에 친구들이랑 저녁 먹고 늦게 온다고 했어.”

“내년에 고등학교 들어가는 데 전공할 것 아니면 바이올린은 그만해도 되지 않나?”

“오케스트라 활동 때문에 봉사활동 점수도 다 채우고 악기 연주 하나 정도는 능숙하게 해야지 공부만 잘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 아니네요. 좋은 대학 가려면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런데 우리 집은 가장 중요한 할아버지의 경제력이 없네.”

“그러게 할아버지의 경제력이 없네.”

나는 아내의 말을 반복하며 미역국에 밥을 말아 고등어조림과 함께 후딱 저녁을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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