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만년 차장 한만운 개납 생존기 - 9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그 밤 이후로 나는 주말마다 이정을 만나게 된다. 평소 주말에도 회사에 출근하여 밀린 업무 등을 하고 왔기에 아내가 특별한 의심을 하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었다. 우리는 도심에서 만나 영화나 연극을 보고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회사에서 팀장으로서의 의무와 가정에서 아빠로서의 역할에 지친 나에게 그녀와의 데이트는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이정 씨는 왜 결혼을 안 했어요. 이렇게 예뻐서 많은 남자들이 프러포즈해왔을 텐데.”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나는 물어보았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서 엄마와 이혼을 했어요. 나와 엄마를 버리고 젊은 애인과 미국으로 가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남자를 못 믿게 됐어요. 그래서 결혼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대신 일과 결혼했지요. 피트니스 클럽을 제 힘으로 개업하는 것이 꿈이에요.”
그녀는 나에게 그동안 피트니스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사진과 헬스 트레이너 자격증 등을 보여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것이었군요. 어쨌든 조만간 클럽을 개관하신다고 하니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학림다방을 나와 마로니에 공원을 걸었다. 공원에는 개그동아리들의 즉석 콘서트와 마술 공연, 그리고 통기타를 든 젊은 가수들의 버스킹 공연 등으로 시끌벅적했다. 노점에서 솜사탕을 사서 나눠 먹으며 걷는 우리들 앞에 벚꽃이 비처럼 흩날렸다. 이정은 나의 팔에 팔짱을 끼며 연인처럼 볼에 키스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는 느낌이었다.
주말에는 데이트를 했지만 평일에는 운동을 같이 했기에 이정과 나는 일주일 내내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사내연애를 하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 몰래 둘 만의 신호를 보고 알아차리는 기쁨도 있었다. 내가 스쿼트 운동을 하고 있으면 그녀는 슬쩍 나의 엉덩이를 만지고 지나갔다. 그러면 나도 남들이 보지 않게 그녀의 손을 살짝 만지고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그녀의 손을 만지다가 반대편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트레이너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내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본 것을 알아챘는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다른 여성회원의 운동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나를 바라보던 표정이 질투에 가득 찬 눈빛 같아 꺼림칙했지만 헬스장에서 이정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많은 눈길을 익히 알고 있었던 나는 트레이너도 그런 남자들 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하며 그에 대하여 우쭐한 호승심이 들려하였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남성 회원들이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항상 타이즈에 가슴이 밀착한 탱크톱을 입고 운동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남자들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들도 좋아하기 마련인 것을. 그녀가 나만의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