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지와 박인수,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
1.
너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를 소설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의 감정과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소설가는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에 김영하는 “소설가는 직감하고 느끼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그 대답의 일부가 소설집 “오직 두 사람”중“최은지와 박인수”라는 작품에 담겨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출판사의 사장으로 회사를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50대의 가장이다. 나에게는 출판업에 뛰어들어 직장생활을 시작할 당시에 나의 사수였지만 오랜 출판업 생활로 영혼의 동지처럼 지내는 박인수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폐암 말기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리고 출판사 사장인 나에게 자신의 고충을 호소하는 최은지라는 여성이 등장하고 나와 박인수, 나와 최은지 두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를 통해 내가 겪게 되는 조금은 기묘한 사건들이 전개된다.
사장실에 최은지가 등장하면서 나는 심리적 파동을 겪는다. 그것은 미모의 젊은 여성이 사장실에 혼자 들어와서 털어놓을 고백이 심상치 않을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쥴리언 반스의 소설 제목처럼 최은지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하였다는 말을 나에게 한다. 그리고 출산휴가를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를 해 온다. 여기서 나는 예스나 노로 대답하면 충분하였지만 “저녁을 먹으며 자세한 내용을 얘기해보자.”라는 식으로 제안함으로써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최은지라는 미모의 여성의 비밀을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과 이것을 계기로 그녀와 내가 특별하게 엮일 수도 있다는 내면의 무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예견하지 못한 결정이었다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된다.
박인수 병문안 시 이런 얘기를 하자 박인수는 최은지의 개수작에 놀아나지 말고 그녀를 해고하라고 나를 다그친다. 내가 미혼모의 운명을 짊어질 젊은 여성에게 그렇게 모질게 할 수는 없다고 반박하자 그는 나에게 자기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으라고 한 후 그것을 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제일 후회하는 게 뭔지 알아? 주먹이 날아오면 이렇게 잘도 피하면서 왜 영혼을 노리는 인간들에게는 멍하니 당했냐는 거야.”최은지가 나의 영혼을 노릴 이유가 없다는 나의 말에 박인수는 “그러니까 개수작이지.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타인에게 개수작을 하는 인간들이 있어. 잔잔한 호수만 보면 돌을 던지는 어린애들처럼.”하며 경고한다.
박인수의 경고는 현실이 되어 나를 압박한다. 저녁식사를 하며 아기의 아빠가 대리부였다고 말하고 최은지는 나에게 아이의 대부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한다. 며칠 후 최은지는 천사가 나타나는 길몽을 꾸었다며 점심시간에 직원들에게 자신의 임신을 알리고 진심 어린 축하를 받게 해 달라고 한다. 아이의 대부인 내가 직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자기의 사정을 옹호해주어 본인의 출산휴가 등에 협조를 이끌어달라는 얘기에 미온적으로 반응하는 나에게 최은지는 적반하장 격으로 화를 낸다.
기자와의 약속을 핑계로 발표를 하루 연기하게 하자 최은지는 이에 앙심을 품은 듯 직원들에게 아이의 아빠가 나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며 본인은 악덕 사장의 갑질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것을 계기로 회사에서는 나에 대한 추문이 돌고 때마침 은행의 대출상환기일이 되어 대출상환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나는 장인 장모의 집까지 담보로 제공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박인수는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을 예견한 듯 나를 책망하지만 계속 기침을 하고 가래를 끊임없이 토하며 말기 암환자의 몸 상태를 보여준다. 그는 마지막 버켓 리스트가 무엇이냐는 나의 질문에 첫사랑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양다리를 걸치며 자기에게 성병까지 옮겨 준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이해되지는 않지만 나는 죽어가는 친구를 위하여 그녀에게 그가 죽기 전에 만나고 싶어 하니 한번 만나 달라고 부탁한다. 며칠 후 병문안을 와서 병실에 들어가기 전 그녀가 그의 앙상한 몸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우는 모습을 본 나는 박인수의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녀가 떠난 이후 박인수는 그녀가 자기에게 옮긴 성병의 병균마저 보관하고 싶었다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 이후 자신의 여성편력은 모두 첫사랑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고백을 하는 박인수를 나는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
회사의 어려움을 장인 장모의 재산을 담보로 극복한 후 아내와의 사이에 묘한 갈등이 발생한다. 급기야 최은지와 나의 소문을 지인으로부터 들은 아내는 나에게 노발대발하며 해명을 요구하지만 아무 관계도 아니고 잘못된 소문이라는 나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다. 아무 관계도 아니면 왜 처음부터 소문을 말하지 않았느냐,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 자신에게 숨긴 거 아니냐며 나의 외도를 의심하는 아내와 나는 그날부터 각방을 쓰며 심리적 별거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회사에서는 여직원과의 추문으로 리더십을 잃고, 은행으로부터 능력 부족으로 대출상환을 독촉받던 나는 믿었던 배우자에게조차 신뢰를 잃으며 막다른 절벽으로 내몰린다.
신문에 실린 저 사람의 얼굴
궁지에 물린 저 사람의 얼굴
어떤 대답이든 나오기를 재촉당하고 있는 저 얼굴
늙어가는 한 중년 남성의 얼굴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었던
평온한 인쩰리겐찌야의 얼굴
애써 태연을 가장하지만
어딘가 한구석 허물어지고 있는 얼굴
...(이선영 作 늙는 얼굴 중)
이러한 모습은 소설 속의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50대 가장이라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듯한 직함으로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직장, 사회, 가족으로부터 점점 유리되어 소외되고 현금 출금기의 역할만을 하게 되는 늙는 얼굴들. 이 소설이 나를 끌어당긴 매력은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상념에 젖어들게 된다. 대한민국 50대 가장들이 느끼는 아픔과 상실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작가의 필력에 경의를 표한다.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또다시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고 있는 박인수를 찾은 나. 어쩌면 나는 박인수의 죽음을 통해 현재 내가 처한 삶의 어려움을 위로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토로에 박인수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은 견디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며 나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그냥 감당해. 오욕이든 추문이든. 일단 그 덫에 걸리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인생이라는 법정에선 모두가 유죄야. 사형선고받은 죄수가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마지막 위로를 끝으로 친구는 눈을 감는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잊지 못하던 첫사랑이 아닌 두 번째 부인과 아들이 조문객을 받으면서 영혼의 친구 박인수는 그렇게 나의 곁을 떠나간다.
최은지와의 스캔들은 계속 나를 괴롭히지만 미혼모 둘을 신규직원으로 맞이하고 그들과 최은지를 팀으로 만들어 관리하면서 소문의 강도는 점점 희석되어간다. 자기 계발서가 히트를 치면서 출판사의 재정상태도 좋아지지만 한번 신뢰가 깨진 부부관계는 좀처럼 복원되지 않는다. 여전히 각방을 쓰고 이제는 오히려 내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게 된다. 회식에서 대놓고 나와 최은지 사이를 의심하며 나에게 개새끼라고 욕설을 하는 남자 직원을 다음날 해고하면서 나는 “위선이여 안녕”이라는 문구로 앞으로의 인생을 예고한다.
3.
이 소설의 화자를 나에서 최은지로 대체해서 생각해보면 다른 시각에서 두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가 전개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던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아이 아빠와 결혼할 수는 없는 상황, 어쩔 수 없이 미혼모의 길을 결정하지만 경제적, 사회적인 측면에서 회사에서 퇴직할 수 없다면 회사의 오너에게 자신의 처지를 부탁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오너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저녁식사까지 제안하자 최은지는 오너에게 아이의 대부가 되어 줄 것을 부탁하고 그 부탁을 들어준 오너. 미혼모인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중년의 재력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맘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 이런 기대를 배신하고 당초의 약속을 파기한 것은 출판사의 사장이다. 이런 위선자에게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아이와 나를 위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회사 내에 조성하는 것이 잘못인가. 한 번뿐인 인생 위선자로 살 수 없지 않은가.
최은지와 나, 박인수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이 세상에 모든 두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소설가들은 듣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그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아니 느끼고 있다. 그들의 직감과 노력으로 우리들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 읽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