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무진기행
내가 무진기행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1학년 프레쉬맨 시절 교양필수과목인 대학국어시간이었다. 소설론 첫 페이지에 나온 무진기행을 읽고 소설의 매력에 푹 빠져 문학서클에 가입했다. 하지만 당시 교내 문학서클은 막스의 자본론 등 사회과학서적을 주로 읽고 시대적 분위기 상 순수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영화동호회 활동을 하며 문학서클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다. 그래도 수업시간에 들은 안개를 묘사한 문장은 두고두고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본문 중에서)
학교를 졸업하고도 우연히 안개를 만나게 되면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사회인이 되고 최근에 시를 공부하게 되면서 기형도의 안개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지금은 안개를 보면 무진기행과 함께 기형도의 시가 떠오르게 되었다. 기형도의 신춘문예 등단작이기도 한 이 시를 읽으면서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20대에 요절한 기형도 시인도 소설을 의식했을까? 궁금한 대목이긴 하지만 상상에 맡길 수밖에.
안개 / 기형도
아침저녁으로 샛강(江)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일꾼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劫奪)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다시 소설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남자 주인공 윤희중은 첫사랑에 실패하고 제약회사 대표의 딸인 과부와 결혼한다. 재벌회사의 사위가 되어 승승장구 중이다. 전무이사 승진을 앞두고 장인과 부인의 권유로 고향인 무진에 머리를 식히러 온다. 고등고시를 패스하여 세무서장이 된 친구 조와, 후배 박군, 그리고 초등학교 음악교사인 하인숙을 만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회식을 한다. 회식 중에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대학 졸업연주회에서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을 부르던 시절을 그리워하던 인숙과 귀갓길이 같아 동행하게 된 희중. 귀갓길에서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조금만 바래다주세요. 이 길은 너무 조용해서 무서워요." 여자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여자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나는 갑자기 이 여자와 친해진 것 같았다. 다리가 끝나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그 여자가 정말 무서워서 떠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바래다주기를 청했던 바로 그때부터 나는 그 여자가 내 생애 속에 끼어든 것을 느꼈다. 내 모든 친구들처럼, 이제는 모른다고 할 수 없는, 때로는 내가 그들을 훼손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더욱 많이 그들이 나를 훼손시켰던 내 모든 친구들처럼.(본문 중에서)
인숙과 다음날 오후 만나기로 한 희중은 오전에 어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하기 위하여 갔다 오는 길에 자살한 여인의 시체를 수습 중인 마을 사람들과 경찰관을 만난다. 읍내 술집의 작부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여 청산가리를 마시고 죽은 것이다. 어젯밤 잠이 들지 못하고 뒤척였던 것이 자살한 여자의 임종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을 한다. 이모의 집으로 돌아오니 세무서장 조의 메모가 있었다. 세무서에 들르라는 거였다. 순간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기 위한 친구의 치기를 눈치채지만 그래도 친구를 보기 위하여 세무서장실로 향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한가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서류에 조의 도장을 받아갔고 더 많은 서류들이 그의 미결함에 쌓였다. "월말에다가 토요일이 되어서 좀 바쁘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 바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바쁘다, 자랑스러워할 틈도 없이 바쁘다. 그것은 서울에서의 나였다. 그만큼 여기는 생활한다는 것에 서투르게 바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서투르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설령 도둑질이라고 할지라도 서투르다는 것은 보기에 딱하고 보는 사람을 신경질 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미끈하게 일을 처리해버린다는 건 우선 우리를 안심시켜준다.(본문 중에서)
조와의 만남을 통하여 인숙이 서장과 결혼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후배 박이 인숙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의 편지를 연적일 수 있는 서장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서장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고 있는 인숙에게 연정을 느끼는 희중. 남자는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듯이 그날 오후에 그녀와 정사를 한다. 그리고 여자는 그에게 일주일간의 다정한 로맨스를 제안한다. 하지만 승진과 관련하여 급박하게 서울로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는 희중.
모든 것이 선입관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본문 중에서)
나는 대학국어시간에 소설을 접하고 KBS TV문학관을 통하여 드라마화된 작품을 본 기억이 있다. 젊은 시절 박근형과 김미숙 배우가 남녀 주인공을 연기하였다. 김승옥 작가가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김수용 감독이 만든 "안개"는 보지 못했지만 정훈희 가수의 "안개"라는 가요가 OST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가요는 최근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 송창식과의 듀엣곡이 삽입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
김승옥 작가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생명연습"으로 등단 후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총아로 사랑받는다. 당시 문학사상 문예지 주간이었던 이어령 박사가 김승옥이 소설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하여 호텔을 얻어주고 잡지사 직원 둘을 그 옆 방에 묵게 하여 그를 감시하게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잘 나가던 그는 광주의 5.18을 겪고 나서 집필 의욕을 잃고 절필을 하고 만다. 이후 종교에 귀의하여 새로운 인생을 맞이한다.
몇 년 전 순천만을 여행하며 김승옥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팽목항에서 짙은 안개를 보고 온 길이라 그의 소설 무진기행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절필하지 않고 계속 소설을 썼다면 얼마난 많은 명작을 우리는 더 볼 수 있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작가가 절필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그리고 중년에 이르러 소설을 쓰게 된 나의 삶도 안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순항할 수 있기를 같이 기원해본다.
대문 이미지(Free image on Pixabay)
https://www.youtube.com/watch?v=CKSlq-yoNn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