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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인에게 찾아온 마지막 등롱

박범신의 은교

by 하기


박범신의 은교

노시인에게 찾아온 마지막 등롱



박범신의 은교는 평생 시를 쓰며 문학적 업적을 사회로부터 인정받은 노시인이 젊은 여인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질투 때문에 자신의 제자마저 살해하고 자살하는 몰락의 서사를 담고 있다. 신형철 평론가가 '몰락의 에티카'라는 비평집에서 문학은 '몰락 이후의 첫 표정'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 비평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은교를 읽으며 세계적 명작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생각났다. 롤리타의 첫 문장과 은교의 소설 마지막 부분을 비교해 보자.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아침에 양말 한 짝만 신고 서 있을 때 키가 4피트 10인치인 그녀는 로, 그냥 로였다. 슬랙스 차림일 때는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의 이름은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에 안길 때는 언제나 롤리타였다.(소설 롤리타 중에서)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주었던, 나의 등롱 같은 누이여.(소설 은교 중에서)


나브코프는 롤리타를 나의 님펫이라고 애칭 한다. 박범신은 은교를 등롱 같다고 묘사한다.


그렇다. 그해 가을, 내 집에 하나의 움직이는 '등롱'이 들어왔다. 사실이다. 내 자의식에 인화된 사진 속 나의 집은 그 애를 만나기 전까지 오로지 우중충한 무채색의 어둠에 싸여 있었다. 애드가 앨런 포의 허물어져가는 '어셔 가'저택처럼. 그 애가 들어오고, 비로소 내 집에 초롱이 커졌다. 가을이 깊을 때까진 말 그대로 그 애는 다만 꽃초롱, 혹은 등롱이었다. 그래서 나의 욕망은 비교적 양지바른 곳에 은거해 있었고, 특별히 포악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서 그 애가 아래 위층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쓸고 닦는 것을, 보지 않으면서 언제나 다 보고 있었다. 그 애가 움직이는 대로, 마치 어두운 동굴 속, 초롱불 하나가 오르락내리락, 내 발 앞을 밝히는 것 같았고, 그 초롱을 따라 걸으면 발바닥까지 다 따뜻했다. 나는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의 말을 빌려, 자주 혼자 중얼거렸다.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이라고.(소설 은교 중에서)


롤리타에서 주인공 험버트가 자신의 연적이라고 생각한 퀼티를 찾아가 살해하듯이 은교에서 노시인 이적요는 자신의 제자이지만 자신의 집필실에서 은교를 범하는 서지우를 교통사고를 위장해 사고사 하게 만들려고 한다. 이러한 자백은 소설의 첫 부분에서부터 강하게 독자들의 뼈를 때린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서지우를 내가 죽였다는 놀라운 사실도 미리 밝혀두고 싶다.
눈이 내리고, 그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 숲 그늘이 성에가 낀 창 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소설 은교 중에서)


재능이 없는 제자가 안타까워 자신이 쓴 소설을 공모전에 당선하게 하여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준 은공도 잊고 자신을 늙은이 취급하며 은교에 대한 열정을 조롱하는 서지우와 은교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종업원으로부터 늙었다는 이유로 출입을 통제당하며 모욕감을 느끼는 노시인은 젊은 영혼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너희가 지금 누리는 달콤한 인생을 누가 주었느냐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고, 마음대로 너희들만 누릴 권리는...... 없다고.(소설 은교 중에서)


순수한 시만큼이나 도덕적으로 티 없이 맑을 것이라고 추앙받던 시인의 내면은 이토록 적대감을 품고 세상에 대해 '엿 먹어라'라고 하며 주먹감자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육십 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의 '엿 먹어라'라는 대중들이 나를 숭상하도록 줄기차게 도와준 머리 좋은 병정들, 일부 지식인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변화가 마침내 찾아왔다. 육십 대 중반부터 불현듯 나의 '엿 먹어라'가 그 칼끝을 나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시에게, 나는 '엿 먹어라'했고, 나 자신에게, 또한 '엿 먹어라'했다. 매우 자기모멸적이고 위험한 자의식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세상을 향해, 내 시가 알고 보면 우주의 털끝도 건드린 바 없고, 적요라는 필명도 전술적으로 준비된 도구에 불과하며, 심지어 혼자 살아온 것조차 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소리쳐 말하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꼈다.(소설 은교 중에서)



이렇게 세상을 향해 주먹감자를 날리던 노시인에게 님펫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등롱이었던 그녀는 서지우와 세상 사람들에겐 원조교제나 하는 불량소녀에 불과했다. 그 간격을 노시인은 점점 버거워하기 시작한다.


보통 여자애, 에 불과했다. 이적요 시인이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시인과 달리, 서지우만은 은교의 모든 실체를 사실 그대로 알고 있었다.(소설 은교 중에서)


은교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학교 앞에서 기다리며 일본 시인의 시를 암송하며 행복해하는 노시인. 그의 몸은 늙었지만 그 순간 그의 마음은 20대 청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교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켜 두었다. 은교는 틀림없이 다른 때처럼 뛰어나올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려고 뛰어본 적이 있는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를 향해 뛰고 있는 사람은 더 아름답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하나의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그리운 그를 향해 뛰는 것이다.(소설 은교 중에서)


행복의 절정의 순간에 제자 서지우가 보낸 깡패에게 모욕을 당하고 마음의 문을 닫는 노시인. 그의 두문불출에 걱정이 된 은교는 그의 집을 찾아가 자기의 맘을 전한다.


"말씀 안 해주셔도 좋아요. 제가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겠지만요. 할아부지 맘...... 쪼금요, 저도 안다고 생각해요. 오지 말라면 안 올게요. 그러니깐요. 저 땜에 할아부지, 감옥에 가둘 필요는 없어요. 젊으실 때도 십 년이나 감옥에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할아부지 이렇게 감옥에 있으면요, 저도 공부 안돼 대학 못 들어갈지 몰라요. 은교 안 올 테니까요. 내일은 문 열고 나오세요. 안녕히 계세요, 할아부지!"(소설 은교 중에서)


은교의 간청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시인. 그에게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날린 것은 제자 서지우였다. 서지우의 음모로 자신이 모욕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 시인은 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하여 계획을 한다. 그가 만들어낸 시의 세계처럼 비평가와 독자를 기만하는 마지막 작품으로 완전범죄를 꿈꾸는 것이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소설 은교 중에서)


소설가 박범신은 1973년에 '여름의 잔해'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50여 년간 끊임없이 작품을 쓰며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입지를 구축하며 김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받으며 문단으로부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대부분의 소설이 영화화될 정도로 대중들로부터도 소설의 재미를 인정받았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감수하고, 문재인 전 대통령의 히말라야 등반에 동반하는 등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도 많이 받았다. 최근까지 명지대학교 문예 창작과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며 노하우 전수에도 관심을 기울인 노작가는 아직도 고향인 논산과 서울에 집필실을 두고 창작활동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은교는 그의 문학적 기예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완성된 작품이라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소설에 몰입하게 만들어주는 기술적 요소 외에 서사구조의 정밀성에 있어서도 그의 문학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정점에 오른 소설이다.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도 완성도 있게 만들어져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은교 속에서 서지우의 입장이 아니라 이적요 시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나의 시선을 생각하면 나도 점점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은교의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노시인의 집착이 전혀 낯설거나 역겹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문학이 주는 아름다움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싶은 나의 마음과도 잇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최근 젊은 플랫폼인 카카오 페이지에서 장편소설 '유리'를 완결한 작가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그 열정의 시간이 나에게도 오기를 감히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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