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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골목길을 맨발로 돌아다니다가 마주친 운명

by 하기

인생이라는 골목길을 맨발로 돌아다니다가 마주친 운명

맨발로 글목을 돌다 / 공지영(2011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2011년 제3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공지영의 자전적 소설이다. 자전적이라는 의미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공지영 작가로 추정되고 그녀의 작품이 일본어로 번역 출간되는 과정에서 일본에서 겪게 되는 일들이 소설의 소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전적이라는 이유로 수상작 선정 과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소재를 뛰어넘는 작가로서 인생과 고통의 의미에 대한 통찰과 사회와 역사를 아우르는 문제의식이 소설의 곳곳에 장치되어 있기에 문학적 성취에 대하여는 모든 심사자들이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작이었다.


그의 질문은 간결했다. 그런데 그 간결함 속에는 어떤 간절함이 숨어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를 무심히 두고 볼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김승옥 식으로 말하자면 그의 삶이 '내 삶 속으로 끼어드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평소와는 달리 약간 머뭇거렸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그가 원하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슬펐구요."
그리고 나서 나는 그의 삶과 내 삶이 이 지점에서 서로에게 끼어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따스해졌다. 아마 그를 바라보는 내 눈빛도 그랬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일본인으로서 일본에서 북한에 의하여 납치되어 20여 년간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번역가 H와 만나면서 주인공은 그 번역가가 자신의 인생에 끼어든 것을 느낀다. 이 장면에서 작가는 35년 전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문단의 최정점에 섰던 선배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떠올린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가 누군가에 의해 삶이 간섭받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장면에 대한 묘사를 소설가는 '끼어든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떤 표현은 표현만으로도 예술이 되기도 한다.


모든 운명은 새벽처럼 우리를 덮치기도 하고 안개처럼 서서히 스며들기도 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한 장면은 그래서 내게 오래 각인되어 있다.
처음 만나 몸을 섞고 사랑에 빠지게 된 여자에게 남자는 묻는다.
"인숙이는 좋은 사람인가?"
여자가 대답한다.
"선생님이 그렇게 봐주시면요."
작가 김승옥에게 이 구절은 어떤 나비였을까. 나는 이 구절을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데리고 살았다. 이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한쪽 날개를 찢긴 흰나비가 팔랑팔랑 삐뚜름한 비행을 하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무진기행에서 너무도 쉽게 사랑을 나누는 남녀. 쉬운 사랑처럼 사람도 쉽게 느꼈는지 남자는 질책하듯 여자에게 다그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닌 것 아니냐고. 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라고 대응하면서 남자의 도덕적 힐난을 비난한다. 이 장면에서 작가도 자신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대하여 비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 아버지가 다른 세 자녀. 통상적인 의미에서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든 인생역정을 겪은 그녀의 삶에 대하여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여행 가방안에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끼워 넣었다. 아마도 밤을 지새운 탓에 비행기를 타자마자 곯아덜어지겠지만 그러므로 나는 그 책을 다시 읽기 위해 지니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속의 구절들, 이를테면 "내가 지금까지 이룩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리자베타, 나는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습니다.-이것은 일종의 약속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바닷물 소리가 내게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보입니다.
본문중에서


북한에 납치 당해 20년을 빅터 프랭클이 말한 죽음의 수용소같은 곳에서 생활했던 여인과 종군위안부라는 명목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성적 학대를 당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면서 작가는 국가와 사회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이 얼마나 가학적일 수 있는지, 그 상처를 이겨내고 성장하는 영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숭고하고 위대한 지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작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가겠다는 굳건한 의지도. 그런 자세에 대하여 문단은 이상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작가에게 지지를 보내주었다. 그녀가 맨발로 돈 글목의 끝에 아직도 무궁한 이야기들이 남겨져 우리에게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선물될 그녀의 다음 작품을 고대해본다. 기다리는 시간에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가 함께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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