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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와 함께 사랑도 실려가다

손보미 폭우

by 하기

폭우와 함께 사랑도 실려가다

손보미 폭우


손보미의 폭우는 두 부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상세히 말해서 두 부부가 몰락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 부부는 남편의 실명이라는 외부적인 조건에 의하여 파멸하고, 또 한 부부는 아들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내면적 조건에 의하여 내파하고 있다. 두 부부의 이야기는 하지만 하나의 서사로 통합되어 뫼비우스의 띠처럼 앞과 뒤가 구분되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소설을 이끌어 가고 있다. 소설가의 탁월한 직조 능력이 소설에 더욱 치명적인 매력을 가져다준다.


그녀는 블루스가 음악의 한 종류라는 것조차 몰랐고 그저 끈적끈적하고 야한 춤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날 'BlueShoe'에서 읽은 어떤 블루스 음악의 노랫말을 오랜 후까지 기억했다. "나를 여기에 두지 말아요. 내가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나는 그렇게 음탕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잠시 후 레지던트가 수술이 끝났음을 알려주었고, 집도의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겠으니 따라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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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뇌진탕으로만 믿었던 남편의 사고가 실명으로 이어지면서 평온했던 부부의 일상과 미래가 일시에 무너져 내린다. 생활력을 잃은 남편을 먹여 살려야 하기에 생활전선에서 힘들게 버티어 내는 부인. 남편의 세 번째 마지막 안과 수술을 받던 날 병원에서 읽는 음악잡지는 불길한 예언처럼 그녀를 혼란에 빠뜨린다. 아니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비상구를 제시해주면서 끈적끈적하게 그녀를 유혹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다. 실명한 남편 따위는 버리고 너의 삶을 살라고.


그녀가 응급실에 갔을 때, 남편은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의 부상은 경미했고 이 주쯤 지나자 완치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까지 그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 후로 그는 혼자 외출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항상 집안에서 자판을 두드리곤 했지만, 사연을 방송국으로 보내달라는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녀는 타자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언가가 부서지는 느낌에 사로잡혔고, 마치 벌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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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쌍의 부부가 있다. 남편은 막 대학교의 전임교수가 되었고 아내는 이를 자랑스러워한다. 교수는 구청에서 하는 교양강좌에서 전공과 관련된 미국 음악에 대한 문화강좌를 열게 된다. 실명한 남편이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아내를 위해 이 강좌를 수강할 것을 추천하면서 두 사람은 조우를 한다. 하지만 이 만남이 두 가족 모두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였다면 남편은 절대 이 강좌를 추천하지 않았을 것이고 교수도 강좌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타이머는 시각을 재며 두 부부의 침몰의 시간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웃기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 밤, 저녁식사가 놓인 작은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잠시 후에 강사는 전화를 한 통 받았고, 곧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바깥까지 그를 배웅하러 나갔고, 그의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지난 몇 년간의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남편은 '중력에 맞서서'를 들으며 자판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시디플레이어를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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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디플레이어가 꺼지면서 부부 사이에 남아 있었던 마지막 잔정의 불씨마저 꺼져버린다. 아니 남편이 싫다는 아내를 우겨서 아내와의 부정이 의심되는 교수를 집으로 초대하면서 부부 사이의 신뢰가 결정적으로 깨지게 된다. 그리고 이 초대는 교수 부부의 파탄도 초래하게 된다. 교수가 받은 전화는 아들이 화재현장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었고 아들 옆에 있어야 했던 아내는 자신의 부정을 의심해 초대받은 집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보미 작가는 2009년 '침묵'으로 21세기 문학상을 받고 등단하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2011년 '담요'라는 문제작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이후 4년 연속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한국일보 문학상, 김준성문학상, 대산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으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은 그녀는 2022년 올해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커리어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행복한 소설가이다.


그녀가 2012년 '폭우'로 대상을 받은 다음 해 남편 김종옥도 '거리의 마술사'로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는 등 경희대 국문과 출신의 부부 소설가로도 유명하다. 한강 작가가 가족 소설가로 유명한 것처럼 손보미의 피 속에도 소설가의 본능이 흐르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타고난 재능을 가진 그녀가 앞으로도 멋진 소설로 자신의 세계를 더욱 견고하고 아름답게 구축해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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