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그 여름
'그 여름'은 최은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의 첫 번째 소설이다. 수이와 이경이라는 두 여성의 첫사랑과 그 이별에 대한 보편적이고 특수한 이야기이다. 누구나 겪는 첫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작가만의 섬세한 심리묘사로 포착해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성소수자인 여성 동성애자의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수하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사랑은 응시로부터 시작된다. 말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사람, 우리 모두의 첫사랑처럼......
수이는 자신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오래 바라볼 수 있구나. 모든 표정을 거두고 이렇게 가만히 쳐다볼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경은 자신 또한 그런 식으로 수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본문 중에서)
내성적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이경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운동선수 수이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수이가 찬 공에 얼굴을 가격 당하고 잠시 기절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된 수이가 그녀를 챙기게 되고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넘어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경에게는 축복같이 기쁘기만 한 첫사랑,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심정을 표현하고 싶어 하지만 운동으로 집단 정서에 민감했던 수이는 자신들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축복받지 못할 것을 알고 성실하지만 신중하게 이경과의 관계를 이어나간다.
이경과 수이가 사귄 지 한 달이 되던 무렵이었다. 그날도 강 위 다리 난간에 기대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키 큰 여자가 웃으며 걸어왔다. 이경을 쳐다보는 여자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속을 아프게 찌르는 웃음이었다.
"사귀는 애니?"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수이의 어깨를 툭 밀고 지나갔다. 중심을 잃은 수이가 이경 쪽으로 쓰러졌다.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수이와 이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난간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귀 끝까지 빨개진 수이가 이경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본문 중에서)
내성적이지만 해맑기만 한 이경과는 달리 수이는 어려운 집안 환경에서 축구로 성공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선수생활을 해야만 했다. 남자들과 연습 시합을 통하여 실력을 키우려 하지만 여자들을 훈련 파트너로 여기기보다는 호기심과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남학생들의 모습에 실망하여 코치에게 항의를 한다.
수이가 문제 제기를 하자 코치는 오히려 불쾌해했다. 운동선수가 운동이나 하면 되지 다른 일에 신경을 쓴다는 반응이었다. 그런 소리할 시간에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남자애들은 다 그런 거고, 짓궂은 장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유치한 일이라고 했다. '짓궂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줄곧 생각해왔다고 수이는 이경에게 말했다.
"비열한 말이라고 생각해. 용인해주는 거야. 그런 말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거야.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다니."(본문 중에서)
남학생들의 성추행까지 견디며 축구를 하지만 시합에서 부상으로 축구를 포기하게 된 수이.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불행을 슬퍼할 만한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경이 대학에 입학하여 학창 시절을 즐길 때 수이는 자동차정비센터에서 남자들과 함께 정비기술을 배운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비센터를 다녀야 하는 상황. 대학생처럼 공부하고 멋을 부릴 시간이 없던 수이는 이경과 행색에서 점점 차이를 드러낸다.
그날, 이경이 수이에게 느꼈던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초라한 옷차림에 더러운 러닝화, 새로운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촌스러움, 자기 학력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모습까지도 부끄러웠다. 친구들 앞에서 멋진 애인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이경은 수이 탓을 했다. 수이를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본문 중에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경은 자신과 생활환경이 다르고 리듬이 틀려진 수이에 대하여 묘한 불편함을 가지게 된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새로운 사랑에 대한 설렘이 시작된 것이다. 수이와는 다르게 매끈하게 잘 빠진 몸매와 큰 키로 서글서글해 보이는 은지와 만나고 그녀의 호감을 느끼게 된다.
수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경은 상상할 수 없었다. 수이는 이경이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 비슷한 감정조차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경은 은지에 대한 자기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이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은지에게 심하게 끌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뒤죽박죽이 된 마음으로 자주 울었다.(본문 중에서)
은지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수이에게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이경. 하지만 사랑은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 둘의 사랑은 유통기한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깡통 속에 담긴 통조림처럼.
수이를 만나기 전,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었는지 이경은 기억했다.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무리를 이뤄 다니는 아이들과도 좀체 어울릴 수 없었던 기억. 아무리 아이들을 따라 하려고, 비슷해지려고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애써 바꿔보려 했지만 불가능했으며, 그렇다고 바뀌지 않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본문 중에서)
그리고 끝내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는 이경. 그런 이경을 수이는 말없이 보내준다. 오히려 자신의 탓으로 이별의 이유를 돌려 심리적으로 이경이 편하게 느껴지게 배려하는 수이의 모습에 이경은 마음이 더 아프다.
말도 안 되는 용서를 비는 수이를 보며 이경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너에겐 아무 잘못이 없어, 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야, 라는 말조차 수이에게 상처를 입힐 것 같아서였다. 이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수이의 동그랗고 부드러운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고, 그건 수이도 마찬가지였다.(본문 중에서)
그토록 마음을 설레게 하고 일상을 행복으로 물들게 했던 둘의 사랑이 저물고 다시 혼자가 되는 수이. 이경은 새로운 사랑을 맞이하지만 원룸에서 외로움을 홀로 다독일 시간들이 수이를 기다린다. 어려운 집안환경과 연이은 실패로 체념에 익숙해진 그녀는 이경을 놓아준다.
"이렇게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 나에게 이런 좋은 일이 생길 리 없다고...... 이제 네가 아플까 봐 다칠까 봐 죽을까 봐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데도...... 아니야. 다 지나가겠지. 그럴 거야."
수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나중에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줄어들었다. 앞에 이경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혼잣말하듯 말했다. 처음에 이경을 향하던 시선은 테이블 모서리에 가 있었다. 이경은 테이블 위에 올라온 수이의 손을 잡았다. 수이는 포개진 두 손을 정물을 응시하듯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마음먹었으면 돌아보지 말고, 가." 수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 가줘."(본문 중에서)
그 여름을 읽으며 나는 소설의 미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과 다른 소설만의 매력을 최은영의 소설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소의 리뷰보다 많은 본문 인용을 할 수밖에 없었다. 통째로 본문을 인용하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문장은 하나도 허튼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쇼쿄의 미소를 통하여 작가세계에서 등단한 후 첫 번째 소설집, 두 번째 소설집, 그리고 최근의 '밝은 밤' 장편소설까지 그녀에 대한 문단의 호출과 독자들의 상찬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2010년대 평자와 독자들이 모두 김애란 소설가를 사랑했다면 2020년대는 모두가 최은영 소설가를 사랑한다고 신형철 평론가는 말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는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김준성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등단 10년도 안되어 모두 휩쓸었다. 첫 장편에 이어 '애쓰지 않아도'라는 엽편소설집까지 발간한 최은영 소설가. 소설이 드라마 대본, 시나리오, 웹소설과 왜 다른지 존재의 이유를 알려주는 그녀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아름다운 문체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들을 품은 채 독자와 비평가들을 기쁘게 해 줄 날들을 기다리고 있을 듯하다. 앞으로 많은 독자들이 그녀의 작품으로 소설과의 첫사랑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