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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기 Apr 22. 2023

파쇄를 하며


파쇄를 하며 / 하기



너는 멋진 슈트에

세련된 차를 타고

처음 사무실에 왔었지


베일 듯 각진 모습으로

프린터에 날렵하게 자리 잡고

일정표며 보고서며 성과표로

산출되는 너의 모습은

정말 의젓했다


일 년간 캐비넷과 서고를

부지런히 오고 가며

노란색 파일에 담겨

활약하던 너


인사이동 전 날 분쇄기에 갈려

너의 일 년 동안의 노고와 추억이

조각조각 제분될 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 했다


마침내 가루가 된 너는

검은색 비닐수의에 담기어

화장터에서 소각되는 운명


그러나 너무 슬퍼마렴

정기감사기일이 되면 우리는

스캔되어 전자서고에 헌액된

너의 분신을 불러내어

삼겹살과 소주 한 잔으로

너와의 추억을 반추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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