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마지막 행운 - 9
재산제세 전화상담팀은 양도소득세와 상속증여세에 관한 전화상담업무를 하였다. 나는 상담센터장에게 인사하고 바로 업무에 돌입하였다. 우리 부스에 근무를 같이 하는 직원들과도 인사하고 그들에게 간단하게 업무에 대하여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이근배 조사관. 퇴근 후에 특별한 일 없으면 우리 스터디 모임에 참석해요.”장인수 반장이 나에게 말했다.
“스터디 모임이요. 어떤 건데요.”
“재산난장이라는 모임인데 같이 재산제세 상담사례를 연구하는 모임이에요.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전화 상담하다가 어려운 사례가 있으면 같이 토론하고 논의해서 서로 도움이 되자는 거니까 처음 재산제세 상담하는 직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저도 참석하고 있으니 이 반장님도 같이 해요.”하는 지용태 반장의 말에 나도 그러 마하고 약속을 하여 자연스럽게 스터디 모임을 통하여 전화상담팀의 상담직원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지용태 반장은 자기의 별명이 지백번으로 지인 소개팅 백번만에 간신히 결혼했다고 말하여 나의 폭소를 자아냈다. 자기의 소개팅 경험을 스터디 모임 후에 뒤풀이에서 얘기하는 통에 우리의 모임은 자연스럽게 남녀상열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어 서로 친밀감이 높아지는 분위기였다.
“솔직히 전 이혼하고 제주도에서 왔어요. 이혼녀라는 게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아요.”장인수 반장은 소주 한잔을 마시면서 솔직하게 자기의 신상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상담도 하고 공부도 해서 세무사 시험에 통과하는 게 저의 목표예요. 꼭 성공한 세무사가 될 거예요.”
그녀의 다부진 각오에 나는 그녀의 전남편이 김동호 세무사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마도 자신을 배신한 전남편에 대한 복수심으로 세무사가 되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짠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영희에 대한 생각에 울적한 마음이 들어 술을 많이 마셨다. 지용태 반장 아니 지백번 반장은 아이가 아직 돌이 안됐다며 집에 빨리 가야 한다며 먼저 일어났다.
“이근배 반장님 우리 장인수 반장님 잘 좀 부탁해요. 집까지 길이 어두우니 꼭 집까지 바래다주셔야 해요.”하며 그는 나에게 싱긋 미소를 지으며 회식장소인 제주 흑돼지구이집을 나간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술에 취한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어야 하는 흑기사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재산난장 스터디 모임을 하고 저녁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 되었다. 대부분 제주도에 혼자 내려와 원룸생활을 하는 상담원들은 하루 종일 상담에 지쳐 힘들어도 집에 가서 위로받을 가족이 없었다. 모임 후에 식사와 반주를 걸치고 서로의 힘든 점을 이해받는다는 점에서 가족과 같은 따듯한 분위기가 있어 우리들 사이는 점점 친해졌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가까운 둘레길로 산책을 나가곤 했는데 장인수 반장은 샌드위치를 넉넉하게 준비해와 우리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않고 바다를 바라보며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으며 점심 산책을 즐겼다. 전화상담이 처음이라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지용태 반장과 장인수 반장은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해주어 처음에는 다 그렇다고 나를 다독여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담에도 익숙해져 나의 서귀포 생활은 즐거워지는 듯했다.
재산난장 모임 후에 원룸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장인수 반장과 나는 다른 직원들에 비하여 더 빨리 친해졌다. 그날도 재산난장 모임이 끝나고 아이가 어린 지용태 반장은 집에 빨리 가야 한다며 집으로 가고 나와 장 반장만 마지막에 남았다. 장 반장은 회식 장소인 곱창집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들어와서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했다. 약간의 취기가 용기를 준 걸까. 평소와는 달리 나도 적극적으로 차 한잔 더하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장 반장이 이것을 받아 준 것이다.
장 반장은 원룸으로 들어가 차를 끓이며 나에게 말했다.
“근배 씨는 세무사 공부는 하지 않아?”
“네, 저는 사무관 승진해서 자동부여로 자격증 받으려고요.”
“근배 씨는 7급 공채로 입사해 6급으로 조만간 사무관이 될 테니 걱정이 없지만 난 9급으로 들어와 아직 7급이야. 사무관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그래서 상담센터에 있을 때 세무사 자격증을 따 놓으려고 공부 중이야.”
그녀의 책꽂이에는 회계학과 세법 등 세무사 자격증과 관련된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나는 책꽂이 옆에 차를 마시고 있는 그녀 곁으로 갔다. 망사로 만든 검은색 블라우스 안으로 그녀의 하얀 속살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말았다. 처음에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던 그녀는 싫지 않은 듯 눈을 감고 말없이 있었다. 작고 하얀 얼굴에 오뚝한 콧날, 청반바지 밑으로 보이는 다리가 너무 예뻐 보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그녀의 화장기 없는 입술에 나는 다시 키스를 하였다. 그녀와 키스를 하며 나는 그녀가 나의 마지막 행운이 되기를 갈망하고 또 갈망하였다.
추적팀에서 같은 팀 반원이었던 현지희 조사관이 제주도에 세법교육을 왔다. 그녀는 나에게 메일을 보내 교육기간에 저녁식사를 하자고 하였다. 나도 반가운 마음에 그러마하고 약속을 하고 그녀가 월요일 교육을 마치고 상담센터로 찾아와 우리는 나의 차를 타고 법환포구에 있는 물횟집으로 갔다.
“반장님 좋은 소식 있어요.”그녀의 웃음기 띈 목소리에
“뭔데?”나는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반장님 징계가 해제되어 복권되신다는 소식이에요. 보관 중인 그림 손상에 대한 책임이 신혜주 조사관에게 있다는 게 확인됐어요. CCTV 분석 결과 신혜주 반장님이 고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림을 들었다 내려놓는 과정에서 그림을 놓치는 바람에 그림액자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그것 때문에 변색이 생겼다는 게 확인됐어요. 신혜주 반장님이 실수라고 주장해서 경고 정도로 처분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아요. 반장님은 추적팀으로 복귀하실 수 있다는 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래. 나한테는 행운이네. 하지만 여기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사무관 역량평가 시험도 여기서 준비하기가 훨씬 좋은 것 같고...”라고 말했지만 장반장을 남겨놓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식은 반가운 소식은 아닌 데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머뭇머뭇하며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괜찬으니까 말해봐요. 혹시 영희씨 이야기인가?”
“네, 영희씨가 다음 달에 김동호 세무사랑 결혼한다고 해요. 벌써 임신을 해서 3개월째라고 하는 데 그것 때문에 더 서두르나 봐요. 그 언니 그렇게 안 봤는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호박씨를 까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현지희 조사관은 마치 자기가 배신을 당한 것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법환포구를 바라보니 태풍이 올려는 지 파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영희의 얼굴이 아닌 전남편의 재혼 소식에 장반장이 어떤 표정을 보일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 마음속 영희는 지워지고 장인수라는 여자가 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제주도의 여름도 끝나갔다. 습한 여름이 지나자 눈부신 제주도의 가을이 시작되었다. 인수와 나의 사이는 직원들에게 알려져 회사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내커플이 되었다. 회사 동료들과 상담센타 근처 엉또폭포로 놀러가 지백번 반장과 강창배 동기 등이 보는 앞에서 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로 인수에게 청혼을 했고 인수가 반지를 받아주었다. 키스하면 영원이 헤어지지 않는다는 폭포동굴에서 키스를 하는 것으로 약혼을 대신한 우리는 서로의 목표인 사무관과 세무사가 되면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고 제주도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이어 나갔다.
8월에 세무사 시험 2차를 응시한 인수가 먼저 세무사 시험을 통과하면서 세무사가 되었다. 나는 9월에 사무관 역량평가 시험을 위한 교육에 들어가서 시험에 통과하였다. 같이 시험을 본 세명의 경쟁 대상자가 모두 역량평가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여 나는 프리패스로 사무관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행운이기를 바랐다. 더 이상의 행운은 나에게 오히려 불행을 가져다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나날이었다.
12월 사무관 임관과 동시에 서울지방국세청 징세관실 추적2팀장으로 발령이 난 나는 강북세무서 징세과장으로 발령이 난 여휴동 팀장의 자리를 인수인계받기 위하여 서울로 가야 했다. 서울로 가기 전 세무사 개업 준비를 위하여 한참 바쁜 인수와 함께 제주도 둘레길 트레킹을 일주일 간 하였다.
“근배씨, 서울 가면 거처가 없으니까 내가 전남편과 이혼하며 위자료로 받은 서울 서초동의 메트로스타 아파트에 거주하면 어때. 어차피 결혼하면 들어가서 살 거니까 자기가 먼저 가서 살고 있어. 나는 세무사 교육 다 받고 퇴직하면 서울 가서 합류할 거니까.”
“메트로스타”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요트왕 Y의 주소지 아니었던가. 그 아파트가 나의 신혼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하는 인수의 말에
“아니 예전에 추적팀에 있을 때 Y라는 체납자의 집이었는 데 수색하면서 일이 많이 생겨서 그래서 내가 제주도에 오게 된 계기가 된 곳이었어.”
“아 저번에 얘기한 그 집이 메트로스타였어.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얄궂네. 그래도 자기는 행운아지 뭐야. 능력 있는 여자 덕에 강남의 최고 아파트에 살아보고. 흐흐.”
“그래 난 세상에서 최고 럭키보이지. 진정한 행운아. 내 최고의 행운은 장인수 당신이야.”하며 나는 그녀를 포옹하고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꿈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