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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부부 마라톤 대회 하프, 팬츠를 놓고 가다니..

보스턴 풀코스 도전

"어떡해, 러닝 팬츠를 안 갖고 왔어."

" 잘 찾아봐요. 있을 거야"


2023.9.17. 일요일, 08시

전주 부부 마라톤 대회 하프를 신청하고 토요일 저녁에 전주에 내려왔다. 

지난 6월 울릉도 마라톤 풀코스 3회째 도전 중 넘어져서 다친 이후 첫 대회다. 다시 뛰기도 싫었는데 이렇게 다시 대회에 나가는 걸 보니 웃음이 난다. 


아침에 일어나서 러닝복으로 갈아입는데 러닝 팬츠를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없다. 이런 낭패가 있나.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 


부부 러닝셔츠


날씨 예보로는 비가 온다고 했는데 그래도 아직 24~27도 오르락내리락하는 날씨다. 하필 다른 날은 편한 반바지 입고 다니는데 오늘따라 비가 온다고 해서 긴 바지를 입고 왔다. 대신 입을 반바지가 없다. 러닝셔츠만 얌전하게 두 개가 나란히 앉아있다. 남편 러닝 팬츠는 남편이 챙겨서 가져왔다.


내가 입고 온 긴 바지는 신축성이 없어서 다리 올리기도 불편하다. 남편이 입고 온 긴 운동복 바지를 입고 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운동복 바지라서 인지 가볍고 뛸 만하다. 비가 온다는 예보니 그리 덥지도 않을 것 같아서 헐렁한 바지를 입고 대회장으로 간다. 95 사이즈인데 105 사이즈 바지를 입고 달린다. 폼이 안 난다.


대회장에서는 사물놀이로 흥이 나는데 헐렁한 바지가 자꾸 거슬린다. 


이번 대회는 부부, 가족, 개인이 참여할 수 있다. 부부가 같이 뛸 경우 같이 스타트하고 반환점도 같이 돌고 마지막 피니시도 손잡고 들어와야 한다.  하프 두 번째 도전인 남편에게도 의미 있는 대회가 될 것 같다. 


남편은 11월 5일 jtbc 마라톤 대회 첫 풀코스 도전이고 나는 3번째 풀코스 도전으로 훈련 삼아 흔쾌히 가자고 한다. 


헐렁한 남편 바지를 입은 모습

이상하게 다른 대회와 달리 출발 전 준비가 술술 풀리지 않는다. 


배 번호가 현장 수령이어서 긴 줄이 있었고 부부 하프 팀은 찾기가 어려워서 한참 걸렸다. 컴퓨터가 아닌 인쇄된 종이에서 명단을 찾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렸다.  여기서도 에너지 소진이 있었다. 


준비 운동도 무대에서 할 줄 알고 기다렸는데 하지 않았다. 다른 대회는 주최 측 무대에서 같이 스트레칭하는데 여기는 아닌가 보다. 옆에서 러닝 크루가 빙 둘러서서 준비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했다.  하프인데 몸을 풀어야 한다. 


8시인데 스타트 라인이 어디지?

대회장 옆 도로를 보니 많은 사람들이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둘러서 달려간다. 우왕좌왕 오늘 왜 이러나.


풀 코스는 없기 때문에 하프 선수들이 먼저 뛴다. 


갑자기 운동화가 무겁다. 뛰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무거워서야 원. 무슨 일이지?

신발을 보니 껌이 붙어 있었다. 이런 이런 이런. 얼른 주변에 있는 풀을 뜯어서 껌을 떼어냈다. 뛸 때마다 이렇게 끈적거리면 힘들어서 안 되는데. 껌아, 제발 떼어지거라.


대강 떼자마자 바로 출발 신호로 출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1시간 전에 가서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출발이 늦을 뻔했다. 


천천히 3km까지 달리기로 한다. 몸이 풀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5km가 지났는데도 몸이 무겁다. 비 예보는 이미 물러갔고 해가 나기 시작한다. 구름이 해를 가려야 할 텐데 이렇게 뜨겁다가는 엄청 고생할 텐데 걱정이다. 10km로 변경하자고 남편한테 말했는데 남편은 이왕 온 김에 하프 하자고 한다. 쌩고생 할 이유가 있을까나.


날씨가 더워서 슬슬 바지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안 되겠다. 바지를 걷어서 허벅지까지 말아 올린다. 제발 내려오지 말거라. 허벅지 근육에 바짝 말아서 올린다. 오늘의 완주 여부는 네게 달렸으니 제발 꼼짝 말고 달려주렴.


8~10km가 지나는데도 몸이 풀리지 않고 무겁다. 다리도 무겁다. 10km 반환점까지는 천천히  1km 구간 기록이 6분 40초로 달리고 그 이후에는 6분 20초로 달려보자고 했는데 7분을 넘어서고 있다. 내가 풀코스를 2번이나 뛰었고 하프도 남편보다 더 많이 뛰어봤는데 내가 쳐지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남편이 오히려 나를 기다리다가 다시 뛰고를 반복하고 있다. 손을 잡고 반환점을 돌고 나오는데 구름이 해를 가려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스피드를 냅시다. 이제야  몸이 풀렸는지 나는 가뿐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남편이 힘이 빠져서 따라오지를 못한다. 셔츠와 팬츠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얼굴, 모자, 모두 땀이 뚝뚝 떨어진다.


부부생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힘들 때가 있을 때 아내가 도와주고, 아내가 힘들 때 남편이 저렇게 기다려서 같이 가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셋 키우면서 힘들었을 때를 생각하니 코끝이 혼자 찡해지기도 했다.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들을 힘도 없을 것 같아서. 


식수대에서 생수병으로 머리와 목에 물을 붓고 다시 달린다. 30~40대 부부들은 쌩쌩 달려 나가는데 우리는 한 사람씩 쳐지는 바람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속도는커녕 걷다 뛰다를 반복한다. 


"내가 왜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투덜댄다. 달리기를 할 때는 힘들어도 긍정적인 말을 하지 않으면 기운이 빠진다고 " 힘내자, 한 걸음만 더, 식수대까지, 반이나 왔다, 물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해가 가려서 다행이다. " 이렇게 긍정적인 말을 하자고 제안했고 남편도 그게 낫겠다며 받아들였다. 


목이 마르니 식수대에서 생수병을 들고 달리자고 했다. 생수병 하나 들 힘도 없다. 갈 때는 남편이 에너지가 남아서 남편이 들었고 반환점 돌고 나서는 내가 컨디션이 좋아서 내가 들었다. 힘들 때는 종이 한 장 들기도 귀찮기 마련이다. 다행히도 말아 올린 바지는 잘 버텨주고 있다. 고맙구나. 


마라톤을 할 때는 모든 게 감사하다.  숨 가쁘게 달리고 나면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어서 감사하고, 뛰지 않고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그늘에서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마라톤이 절제의 운동이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달리기 전에는 물도, 밥도 절제하면서 먹어야 가뿐하다. 


마지막 5km 지점에서는 땡볕이 조롱하는 듯하다. 

달릴 테면 달려봐, 하는 것 같다. 그래, 끝까지 달려주마.


도로 위에서 안내하는 봉사, 경찰들에게 미안했다. 너무나 천천히 달려서 쳐다볼 수가 없다. 그나마 몇몇 분들이 웃으면서 힘내라고, 파이팅을 외쳐주실 때는 모르는 분인데도 힘이 난다. 


마지막 1km를 남기고 있다. 피니시 라인이 보인다.

스퍼트를 하고 싶지만 낮은 오르막이어서 쉽지 않다. 더군다나 남편과 손잡고 뛰어야 하는데 남편은 이미 에너지가 바닥인 상태라서 가까스로 달리고 있다. 앞서서 달리다가 남편이 오면 같이 뛰고, 다시 앞서다가 남편이 오면 같이 달렸다. 남편 페이스대로 천천히 뛰다가는 아예 걸을 것 같아서 조금씩이라도 쫓아올 수 있도록 앞서서 달렸다. 

이제 끝난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신났다. 

남편은 힘들어서인지 땅만 보고 달린다. 


나름대로 속도를 내면서 마무리했다. 


숨을 꼴딱꼴딱 삼키면서 메달을 받았다.

남편은 잔디밭에 누워야겠다며 자리를 찾는다. 

예약한 숙소가 12시 체크아웃이라 얼른 짐을 챙기고 나간다. 

차에 앉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핸드폰을 보니 기록증이 이미 나왔다. 

2시간 48분


첫 하프 울릉도 마라톤 기록이 2시간 45분인데 남편은 실망한다. 코스는 울릉도가 더 힘들었고 그 이후에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달리기 연습했는데도 이 모양이니 11월 풀코스를 어떻게 뛰겠냐고 걱정한다. 


나는 2시간 8분 하프기록이다. 남편보다 빠르고 훈련한 시간도 길다. 오늘 기록은 실망이다. 


그러나 좋은 경험이 되었다.


부부가 서로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힘들 때마다 기다려주고 같이 달려주는 것만큼 좋은 게 없을 테니까. 


고속도로 3시간 30분, 귀가하는 동안 자동차에서 부부 마라톤 대회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전주 부부 마라톤 대회

                          

                           김민들레


부부가

같이 출발해서

같이 반환점을 돌고

같이 피니시를 하는 대회


처음 5km

천천히 달리자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리들만의 삶의 페이스로 한 발 한 발


10km 반환점에서 손잡고 찰칵

이런 대회가 또 있을까

햇볕에 고전한다

구름이 해를 가릴 때 얼마나 고맙던지


15km

걷고 만다. 포기는 안 한다. 다시 내딛는다.

도와주고 싶지만 손 내밀고 싶지만 도울 수 없는 경기

자신의 발로 뛰어야만 하는 대회


20km

이제 1km 100m 남았어.

무거운 발걸음, 무거운 마음, 무거운 입

눈빛으로 힘내라고 보낸다


21.097km 2시간 48분

마지막 100m 손잡고 질주

Finish~

우리의 관계는 이제부터 시작


"고생했어요, 수고했어요."

"고생했어요, 수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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