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 보니 최근 읽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싯다르타'가 자꾸 생각나네요.
내가 투쟁이어야 한다는 것, 생성과 목적과 여러 목적들 간의 모순이어야 한다는 것, 아, 나의 이러한 의지를 알아차리는 자는 나의 의지가 얼마나 구부러진 길을 가야 하는지도 알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3p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도 자신이 알에서 나와야 한다고 하고 왜 그리 힘들었는지 자문하곤 했었죠. 니체도 이 책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충돌하고 모순이 생긴다는 것과 이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군요.
삶은 직선이나 계단이 아니라 구 불부 불한 길을 가거나 되돌아가기도 하고 나선형으로 가기도 하죠. 딱히 하나의 모양으로 간다고 할 수 없어요. 그만큼 복잡한 게 삶이 아닌가 합니다. 데미안에서도 싱클레어가 밟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경험하면서 내적 갈등과 방황을 했던 청소년, 청년 시절을 지나면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삶의 모순과 갈등을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두 책에서 보았습니다.
살아 있는 자에게는 삶 자체보다는 다른 많은 것이 더 높이 평가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를 통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힘의 의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3p
니체는 '삶의 의지'보다 '힘의 의지'를 더 높이 평가한다고 책에서도 말합니다. 단순한 생존에 대한 의지보다는 더 나아지려고 하고 성장하려는 힘의 의지를 말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힘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려고 하는 부분이 바로 변화, 성장의 의지죠.
최근 읽은 '싯다르타'하고도 아주 비슷해요. 싯다르타는 단순한 삶을 넘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특히 깨달음은 누구에 의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경험하고 알아내는 과정이라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배움에는 한계가 있고 본인이 경험한 것과는 아주 질적인 차이가 있으니까요.
무상하지 않은 선과 악,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시 극복되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3p
니체는 선과 악은 변한다고 하는데요. 그때는 선이었던 것이 시간, 상황, 맥락에 따라서 악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도 아브락사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합니다. 무조건적인 선도 없고, 무조건적인 악도 없다는 말이 생각나요.
내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선과 악이 존재할까요? 종이 한 장 차이로 선과 악의 감정이 올라올 때가 있지 않으신가요? 니체는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하고, 최고의 선은 창조적인 선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되었다고 하는데요. 마치 극과 극은 하나라는 말과도 일맥 상통하는 말인 것 같군요.
누군가를 평가할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선악의 평가 기준이 아닌가 합니다.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고요.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말에서 기존의 질서, 규칙과 반대되는 카인의 표식에서 갈등하던 내용도 생각납니다. 누구에게는 선이, 누구에게는 악이 되기도 합니다. 좀 더 유연한 사고, 본질적인 사고를 하는 내면의 힘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