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아는 식물들의 근황

by 그사이


책상 주위의 식물들에게서 갑자기 무엇인가 피어오른다. 봄기운인가?

항상 비슷함을 유지하는 실내 환경에 놓인 식물들도 계절과 절기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화색이 달라진다. 참 신비로운 식물의 소생능력이다.

일요일에 내린 눈으로 책상 앞의 앞산은 온통 하얀 설산이 됐다. 한파가 꽤 오래 이어지고 있어 몸이 꽁꽁 얼어 가는데 어느새 입춘이라니 괴리감이 든다.

어떤 변화가 있을까?

겨우내 건드리면 부서질 듯 푸석해진 식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제라늄이 작년에 만들어두어 검은색이라 생각될 만큼 짙어진 초록잎 사이에서 새로 내민 보드랍고 촉촉한 연둣빛 잎들이 섞여 생기가 돈다.

앗! 저것은 꽃봉오리. 잠자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움을 틔우며 알사탕 같은 꽃망울을 만들고 있었다니 기특하다. 한 일주일쯤 지나면 다섯 개 줄기에서 하나씩 올린 첫 봉오리들의 분홍 꽃이 피어날 것 같다. 언제나 조금 부실한 첫 꽃은 꽃잎이 부족하고 색도 연하지만 다음을 약속하고 져버리는 용기의 꽃이다. 그러니 감동일 수밖에 없다.


가을과 겨울 그사이 어느 날에 10년 넘게 살고 있던 하트다육이를 저 세상으로 보냈고, 물 주기를 게을리한 탓에 파란색 꽃이 피는 로벨리아도 시름시름 앓고 있다. 늦게 첫 물을 준 프리지아 구근은 입춘이 돼서야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꽃을 피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일 꽃을 피우지 못하면 다시 1년 동안 잠들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진다.

그리고 지난번에 고민 끝에 죽느냐 사느냐는 오로지 운명에 맡기고 흰꽃기린을 썽둥 잘랐다. 보고 있으면 자꾸 마음이 쓰이니 한쪽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마치 죽은 나무토막 같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안녕 나야. 살아있었지."

나무토막 틈에서 연둣빛 작은 손을 내밀어 나를 향해 흔든다. 여린 손을 덥석 잡고 싶지만 혹시 다칠세라 겁이 난다. 감히 ‘죽은 자식이 살아온 것 같다’는 절묘한 표현을 떠올렸다. 이 순간의 희열을 누가 알까?

식물을 키우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이 마음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식물을 키우는 일은 단순한 취미라기보다 수련이다. 말없는 식물을 매일 들여다 보고 하룻밤새에 누렇게 뜬 잎을 떼어내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 일이니 말이다.

물을 줄 때는 알맞은 온도의 물을 주어야 식물이 놀라지 않는다. 겨울철엔 수돗물을 미리 받아 햇빛아래 두었다가 실내온도에 맞춰지면 주는 것이 좋다.

엄마는 비 오는 날엔 빗물을, 눈이 오는 날엔 눈을 커다란 통에 받아 집안에 두었다가 녹은 눈물을 실내의 식물에게 주곤 하셨다. 벌, 나비가 드나들지 못하니 작고 부드러운 분홍색 그림용 붓으로 수분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실내에 사는 식물에 대한 애정이며 측은지심이라 느껴졌고, 그 마음이 참 좋아보였다.

나는 빗물과 눈물을 모아주진 못하지만 마룻바닥에 물을 쏟아 치워야 하는 최소한의 번거로움 정도는 기꺼이 감수한다. 보일러로 따뜻하게 데워진 물은 왠지 영양가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 식물에게 해주는 최소한의 애정표현이자 엄마가 남겨준 식물키우기 비법 유산이기도 하다.


식물이란 녀석들은 열악한 환경이나 하루하루의 날씨를 개의치 않고, 제 할 일을 한다. 거의 변화가 없어 보이는 지루한 날을 참을성을 가지고 지나다 보면 반짝이는 잎을 내놓고, 화사한 꽃을 피우고 알찬 씨앗을 맺는다.

실내라는 불가항력적인 환경에 놓인 식물들에게 나는 아주 조금의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제 할 일을 저렇게 열심히 하는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고마운 생각과 함께 희망적이고 나도 무언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식물들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아 살아가고 있으니 못할게 무엇인가?

바야흐로 입춘도 되었으니 살아서 꿈틀대는 심장으로부터 연둣빛 작은 손을 만들어보자.

일희일비하며 컨디션이나 마음이 어떻네 하는 핑계를 찾을 생각일랑 접고서.


오늘의 동그라미를 찾다 보니 내가 가진 화분이 모두 동그랗다.

대부분의 뿌리는 흙속에서 둥글게 둥글게 써클링을 하기 때문에 동그란 화분을 사용하게 된 건지 아니면 동그란 화분에 담겨 식물은 써클링을 하기로 결심한 건지도 모른다. 무엇도 탓하지 않는 식물 이어서라는 생각 못하고 그저 식물은 동그란 화분에서 잘 크는가 싶었다.


사진을 찍다 보니 화분 중 딱 하나의 사각모양 화분이 프레임에 들어왔다. 거기에서 흰꽃나도 샤프란이 아주 잘 자라고 있다.

엄마가 남긴 화분을 집으로 가져왔을 때 사각 화분 안에 흰꽃나도 샤프란과 아몬드 페페가 공생하고 있었다. 그것이 좁고 불편해 보여 엉겨 붙은 뿌리들을 억지로 떼어내며 분리하여 두 개의 화분으로 나눴다. 그 분갈이로 인해 둘 다 죽어가다 겨우 살아났다. 두 식물이 어쩌다가 공생하게 된 건지 이유는 엄마가 안 계시니 영원히 알 수 없지만 그 첫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 합식을 했다.

사각화분 안에서 이들의 관계가 다시 원만하길 바라며 예쁜 꽃이 피면 다시 소식을 전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총총..


아프리칸 바이올렛과 축전
아기 흰꽃기린과 대엽풍란
제라늄, 장미허브,흰꽃나도 샤프란. 진저
기적의 엄마 꽃기린과 네마탄투스
하트 다육이가 떠난 빨간 화분에 자리잡은 아기 코인
책상 옆 식물과 또 다른 한켠에 자리한 식물
사각화분 속 흰꽃나도 샤프란과 아몬드페페. 다시 한집살이




식물 키우다 보면 점점 동그랗게 변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좀 더 동그래졌기를..


”나는 식물만 키우면 다 죽어.“ 라고 하지말고 두개의 작은 화분을 서서 키워보아요. 꼭 하나는 살아남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알게 될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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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