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 첫날은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구엘 공원을 방문했다. 가우디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바르셀로나는 볼거리가 정말 많았다. 2박 3일 정도는 구경해야 할 것 같았지만 하루 만에 여행을 마무리해서 아쉬웠다. 다음엔 바르셀로나만 따로 여행해야겠다고 수첩에 메모를 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고 나니 스페인에서 더 구경할 것이 없을 것처럼 여행이 다 끝난 것 같았다. 스페인 여행에 대한 기대가 다소 떨어진 상태에서 이틀째를 맞았다.
호텔에서 아침 조식을 먹고 바르셀로나에서 몬세라트로 향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한 시간 거리(53km 거리)에 있는 곳이다. 버스는 곧 도시를 벗어나 시골풍경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독특한 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깎아지른 듯한 하얀 절벽이 산꼭대기를 이루고 있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몬세라트는 해발 1237m에 이르는 높은 산이다. 카탈루냐 지방에서 몬세라트는 성스러운 산으로 여긴다. 역암으로 이루어진 몬세라트는 그 모양이 특이하다. 산에는 흰 바위가 많은데 마치 톱니 모양처럼 이루어졌다. 몬세라트라는 이름은 '톱니 모양의 산'이라는 뜻이다. 산을 보는 순간 성스러운 산으로 여길만하다고 생각된다. 가우디가 작품활동에 많은 영감을 받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몬세라트는 9세기 경부터 많은 수도자들이 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산중턱에는 성베네딕트 수도원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성베네딕트 수도원(The Monastery at Mt. St. Benedict)은 몬세라트 산 중턱 해발 752m 높이에 위치해 있다. 브라질의 종교 박해를 피하기 위해 1912년 압보트 마후엘 수도사가 수도원을 세웠다. 수도원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소년 합창단이 있으며, '라모레네타'라고 '검은 성모마리아 상'이 있다. 많은 순례자들이 검은 성모마리아 상을 보기 위해서 수도원을 찾고 있다.
여행 전 본 유튜브에서수도원에 한국인 소년합창단원이 있었다. 수도원에 방문하면 그 소년단원도 만나고 합창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다. 또검은 마리아상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몬세라트 중턱에 있는 성베네딕트 수도원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2000여 개가 넘는 등산로를 따라 걸어서 올라가거나, 산악열차나 버스를 타고 오르는 방법이 있다. 순례자들은 걸어서 수도원에 오른다고 한다.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마라톤 하는 사람도 보았다. 가장 빠르게 산에 오르는 방법은 케이블카다.
크리스마스이어서인지 케이블카를 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중 내려다 보이는 산의 모습은 푸른 나무들과 바위가 가득했다. 멀리 도로에는 자동차가 달리고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아래를 내려다보기 아찔해서 케이블카가 오르는 방향만 쳐다보았다. 몇 분 만에 수도원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케이블카 탑승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에서 본 몬세라트 절경
산악열차/ 케이블카
수도원 앞에 도착하니 산 아래에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산중턱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꽤 넓은 공간에 여러 건물과 도로가 널찍하게 나있다. 몬세라트 호텔, 상가, 음식점, 은행, 기념품 가게 등이 죽 늘어서 있고, 산책로에서는 노점상들이 국화차와 꿀을 팔고 있다. 우리나라 SNS에서 국화차와 꿀이 핫하게 올라왔다고 한다. 노점상은 우리에게 “안녕하세요.” 하면서 인사를 건넨다. 이 높은 곳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방문하는지 실감하는 순간이다.
케이블카에 내려서 몬세라트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겹겹이 쌓인 산과 산, 자욱하게 깔린 아침 운무, 산과 운무 사이에 퍼지는 아침 햇살, 바다에 맞닿은 파란 하늘, 자연이 펼친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눈에 익숙한 모습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지리산 자락의 풍경 같다는 생각이 든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피레네 산맥과 그 너머 지중해를 보면서 스페인 여행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하였다. 바르셀로나를 떠나올 때 ‘이제 스페인 여행은 더 볼 것 없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했다.
수도원에서 내려다본 절경에 반하다
몬세라트 절경
몬세라트 톱니 모양 바위 산
성베네딕트 수도원 입구에는 1810년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몬세라트를 파괴했을 때도 남아 있는 문이 있다. 의미 있는 곳이라며 가이드님이 한참 설명을 했다. 문을 지나면 음각으로 조각된 성조르디(용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한 기사) 조각상이 있다. 가우디의 제자 수비라치의 작품이다. 눈동자가 우리가 이동함에 따라 쳐다보는 느낌이다. 정말 입체적이다. 아 뭐야. 우리가 왔다고 지켜보고 있는 거야?
성베네딕트 수도원 광장에 섰을 때 크리스마스 아침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리스마스 아침 9시 산 중턱 수도원에서 듣는 종소리라니. 한참 동안 울려 퍼진 종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가이드님은 수도원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수신기로 뭔가 열심히 설명을 했으나 수도원의 종소리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설명 대신 한참 동안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종소리를 들으며 수도원을 감상했다.
‘그래 뭐, 지식과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겠는가? 2023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몬세라트에 있는 이 수도원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나중에 가이드님에게 ‘검은 성모마리아 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수도원에서는 9세기경의 것이라 주장하지만 과학기술로 확인한 결과 대략 1200여 년 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양치기에 의해서 동굴에서 발견되었는데, 동굴 속에서 초의 그을음 때문에 검은 마리아가 되었다고 한다. 흑인 인어공주를 캐스팅하면서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디즈니 영화계에서처럼 흑인 마리아상인줄 알았다. 800여 년 전 흑인 마리아상이었다면 어땠을까? 인종차별과 이교도 탄압이 심하던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려나.
산 중턱에는 성베네딕트 수도원 이외에 군데군데 조그마한 십자가가 보였다. 우리나라 산 중턱에 조그마한 불교의 암자가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종교인들은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깊은 산속에 터를 잡고 표식을 했을까. 깊고 높은 산중에 올라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은둔자의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수도자의 마음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사람들이 가득한 도심에서는 정리되지 않고 쫓기듯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니 산중 깊숙이 들어앉는 것이 수도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크리스마스 아침 미사를 드리는 순례자는 수도원에 입장할 수 있으나 우리 같은 관광객은 들어갈 수 없었다. 소년합창단의 합창도 들을 수 없었고, 수도원에 모셔져 있는 검은 마리아상은 보지 못했다. 대신 수도원 주위로 펼쳐진 자연 풍광만큼은 마음껏 즐겼다.
크리스마스 아침 몬세라트 중턱 성 베네딕트 수도원 앞에서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여행에 대한 욕심도 맑게 비워낸다. 알게 모르게 소란스럽고 번잡스러웠던 일상도 조금은 내려놓아지는 듯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도자의 마음을 조금은 맛보았다고 해야할까.
수도원 앞의 꽃 댕강나무를 보며 집 앞 아파트 울타리를 떠올리며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나간다.
스페인 여행 첫날은 천재 건축가의 예술 작품을 반했다면 둘째 날에는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흠뻑 젖었다. 누가 여행코스를 짰는지 기가 막히게 절묘한 조합이다.
성베네딕트 수도원
성베네딕트 수도원 입구 톱니바퀴 바위 산
수도원 앞에 펼쳐진 정경
수도원에 들어오는 아침햇살
성베네딕트 수도원과 주위 정경
몬세라트 호텔과 관광안내소 앞 이정표
나폴레옹 폭격에도 건재한 수도원 출입문/ 음각 기사 눈동자가 따라온다
검은 성모마리아/ 수도원 입구 조각 성모마리아상 봉안 모습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점심을 먹으러 갔다. 현지인 식당이었는데 태극기가 문 앞에 붙어 있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나 보다. 담백한 돼지고기 요리가 나왔다. 식사 때마다 나오는 딱딱한 빵과 샐러드, 오렌지를 곁들여 먹었다. 스페인 현지식은 빵과 샐러드, 돼지고기나 닭고기가 주를 이뤘다. 몇 끼를 비슷하게 먹으니 벌써 음식이 물리려고 했다. 식당 테이블에는 올리브오일과 발사믹식초가 우리나라 간장이나 식초처럼 항상 곁에 있었다.
점심 후에는 버스를 타고 발렌시아로 이동했다. 여행기간 동안 가장 긴 이동 시간이었다. 다소 지루할 시간에 가이드님이 스페인 역사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전날 잠을 푹 자서인지 졸지도 않고 열심히 들었다.
BC 1세기말에는 로마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 500여 년간 로마의 식민지, 5세기 중엽 로마제국이 쇠퇴와 게르만족의 대이동, 서고트족의 침략과 스페인에 왕국을 건설, 7세기 초 기독교를 받아들임, 8세기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온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음, 그 후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이 꾸준히 전개, 11세기 당시 스페인은 카스타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으로 양분, 1459년 양국의 수반인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의 결혼으로 통일 스페인 왕국을 설립했다.
15세기 후반 마침내 잔재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절대 왕정 시대, 15세기에는 대항해 시대를 열고 활발한 해외 진출로 부 축적, 16.17세기 정치. 경제. 문화가 발달한 스페인 황금시대, 이후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정치적 혼란,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인해 몰락, 1336~7년 스페인 내전, 프랑코 총통 36년간 군부독재, 현재 국왕이 있는 나라, 입헌민주주의 국가체제 수립 등등.
이야기 중에서 스페인 역사의 통일을 이룬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 그의 딸인 광녀 후아나와 카스티야의 펠리페 1세 이야기는 역사를 넘어서 이야기로서 흥미진진했다. 스페인이 16~17세기에 식민지로 많은 부를 축적했지만 로마와 이슬람 지배를 받았으며 최근에는 독재지배하에 있었으니 그의 역사도 평탄치만은 않았다.
이동하는 중에 두세 번 휴게실에 들렀다. 버스 기사는 4시간마다 휴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휴게실에서 보통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휴게시간을 가졌다. 처음 휴게소에서는 자판기 커피를 마시려다 사용법을 잘 몰라 한참 헤맸다. 착즙 오렌지 주스가 맛있다고 해서 착즙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오렌지주스보다는 덜 시고 감귤주스보다는 좀 덜 달았다. 마시기 알맞은 농도와 맛이었다. 시판된 레몬주스도 꽤 맛있었다. 저녁에 맥주파티를 위해 술안주로 과자를 샀다. 첫날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아서 안주거리를 찾아 한참 헤맸기 때문에 미리 사둔 것이다.
저녁은 중국 뷔페식을 먹었다. 스페인식만 몇 끼 먹다 보니 중국식이 반가웠다. 다양한 음식이 있었으나 튀긴 기름진 음식이 많아서 많이 먹지는 못했다. 맥주도 한잔씩 했다. 스페인 맥주는 병맥주와 생맥주 모두 깔끔하고 맛있었다. 술을 부르는 맛.
이정표/ 돼지고기 요리
휴게실 레몬 주스/ 과자
오후 내내 달려서 발렌시아 근처에 있는 카스테욘 중소도시 호텔에 숙박했다. 여행 일정은 6시에 끝났다. 일정이 일찍 끝나서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치안에 주의하라는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생긴 부작용인지 낯선 도시라 조금 무섭기는 했다. 여섯 형제들이 함께 걸으니 그나마 두려움은 조금 잊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즐긴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거리는 한산했으며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몇몇 청소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거리를 헤매는 모습도 보였으나 거리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대학교(나중에 찾아보니 UJI 하우메 대학교)도 있는 것을 보니 제법 큰 도시(인구 60만, 면적 6,679 km2)인 것 같았다. 서울시 따릉이와 같은 공공 자전거도 있었다.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가 보았더니 우리나라와는 달리 결제할 수 있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고 결제를 하면 해당 자전거 자물쇠가 풀어졌다. 호텔 앞에는 큰 고속철도 대합실과 버스 승강장이 있었다. 중소도시인줄 알았는데 꽤 큰 도시 같았다. 여유시간이 주어져 잠시나마 도시를 산책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시간여의 도시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형제들끼리 모여서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즐거운 여행을 위하여~ 맥주는 조금만. 막내는 첫날 음식이 맞지 않아서 설사가 났고, 서방님도 토를 했다고 한다. 여행 중 음식이 탈 나지 않도록 주의!
카스테욘 유로호텔 주위 거리 야간 산책/ 서울의 따릉이 같은 공공 자전거/ 고속철도 승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