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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대학 신입생 시절

자서전 함께 쓰기 프로젝트

by 하민영

소녀는 어느새 성인이 되었다.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창공을 나르는 자유로운 새 같았다.


<꿈의 대학생>


드디어 대학에 입학했다. 어깨가 '뽕' 만발하고 광대가 하늘로 승천할 만큼 솟았고,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고 어느 누구보다 자기가 제일 잘난 것 같았다. 대학생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녀가 대학에서 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워낙 악필이라 글씨를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서예를 배우는 서도회에 들어갔다. 둘째, 친구 승은이가 탁구를 잘 쳤는데 대학생이라면 운동하나쯤은 기본이라 생각해서 테니스 동아리에 가입했다. 셋째, 친구 선미와 진영이 덕분에 노래와 기타 감성을 살리고 싶었다. 선미가 잘 불렀던 '찔레꽃'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노래패에 입단했다. 기타를 잘 치고 싶다는 낭만적인 마음이었다. 넷째, 대학을 상아탑이라고 부르는 만큼 친구들과 언제 어디서든지 모여서 자유롭게 토론하며 배우고 싶었다. 강의실에서도 교수와 학생이 활기차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심도 있게 학문을 탐구하며 열띤 토론을 거쳐 학문의 깊이를 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희망을 노래하는 3월>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부푼 기대와 희망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이라면 가방을 메고 두꺼운 책 한 권쯤은 옆구리에 껴야 할 것 같아 잔뜩 겉멋을 부렸다. 대학교는 고등학교와 달리 수업이 많지 않았다. 어느새 가까워진 과 동기들끼리 삼삼오오 어울리기 시작했다. 공강시간에는 친구들끼리 빈강의실을 찾아 어슬렁 거리거나 잔디밭, 지하에 있던 온고을 학생휴게실, 학생회관 이층에 있던 여학생 휴게실 등을 배회했다. 며칠 지나니 총 동아리 연합회에서 동아리 회원을 모집했다. 뒤이어 의대 동아리에서도 회원을 모집했다. 그녀는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총동아리에서 서예를 배우는 서도회에 들었고, 의대 동아리는 테니스회를 들었다. 의과대학과 간호학과 학생회에서는 신입생 환영회를 했다. 간호학과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학생회장인 선임 언니가 기타를 치며 '개똥벌레', '아침이슬' 등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멋지다고 생각했다. 의과대학 신입생환영회를 보고 친구들은 '그룹사운드 베이스기타가 멋있네 세컨드가 멋있네' 하는데 그녀는 '엄마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라는 '찔레꽃' 노래를 구슬프고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선주(?) 언니 모습에 빠졌다. 2학기에 회원을 모집한다는 찔레꽃 노래패에 들겠다며 선배들에게 일찌감치 눈도장 찜해두었다. 서도회와 테니스회는 일 년을 넘기지 못했고, 찔레꽃은 졸업할 때까지 열심히 참여했다. 찔레꽃은 매년 공연을 했고, 학생회 여러 행사에 공연을 하기도 했다. 수시로 잔디밭에 모여서 기타 반주에 맞추어 멋들어지게 민중가요를 부르며 여흥을 즐기기도 했다.


당시 대학 학생회는 운동권이 꽉 잡고 있었고, 동아리도 운동권들이 많이 활동했다. 회장성향에 따라 활동내용이 좌지우지되기도 했다. 학생 중 삼분의 일은 학생회 활동을 했고, 반은 학생회 활동과 관련이 있었으며, 사분의 삼정도는 학생회 활동에 동의했다. 극소수만 빼고는 운동권의 영향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아리도 무늬만 순수 동아리일 뿐 사회참여를 유도하거나 학습하는 동아리가 많았다. 노래패, 풍물패, 그림패, 연극 동아리뿐만 아니라 학술연구 동아리 등 많은 동아리가 사회 문제에 참여를 목표로 하는 모임을 했다. 그렇다고 순수 노래, 풍물, 그림, 연극 등을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참여하는 것을 독려했다. 의식화나 조직화라는 것이 쉽지 않다.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일은 결국 각자의 선택의 영역이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란 대중의 깨달음과 스스로 요구를 넘어 참여로 가능한 일이다. 또한, '조직화 된 대중의 힘' 을 만들기 위해 동분 서주하고 앞서 나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루어진다.


부모님은 '대학 가면 데모하지 마라, 앞장서지 마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녀는 운동권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전혀 없었다. 대학생이었던 언니 오빠들이 집에 오면 아버지와 나누는 사회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나 비판의 목소리를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관심을 가졌다. 대학에서 접하는 모든 새로운 것을 알고 싶었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도 수용할 수 있었다. 설사 의도를 가지고 있는 선배들이 다가왔다고 해도 괜찮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민주화 열기>


87년 6월 항쟁, 6.29 선언, 대통령선거 등 폭풍 같은 시기를 거쳤고, 88년은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다.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준비하기에 바빴으나 학생들은 민주화 투쟁을 이어가려고 했다. 3월에는 시국의 열기가 잠깐 수면에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었고, 4월부터는 땅속에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민주화의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학생회나 동아리에서는 대자보, 현수막을 내걸었다. 항쟁의 역사를 알리고 독재정권을 반대했다.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현실에 분노했고,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그녀는 고등학교까지만 해도 역사적 현실을 몰랐다. 학교가 보여주는 제도교육의 제한된 틀 안에서만 배웠다. 그런데 대학에서 만나는 역사적 사실은 그동안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일어난 현실은 같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시각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동안 무엇을 진실이라고 여기며 혹은 배우며 살았는지 혼란스러웠다. 알지 못했던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의문은 커졌고, 진실을 향한 갈망은 드높아갔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 알고 싶다는 욕구가 커져갔다.


88년 4월이 되면서 학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4.19 혁명을 앞두고 학생회관과 단과대학 건물마다 대자보가 더 많아졌고, 학내에 집회도 잦아졌다. 학생회에서는 4.19 혁명 기념 집회에 학생들이 참석하도록 독려했다. 집회 참석자 중 1학년 신입생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하루는 의과대학에 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대자보를 꽤 유심히 읽고 있는데 의대 연호선배가 친절히 말을 걸어주고 설명도 해주었다. 학내에서 집회를 마치고 시내에 있는 코아백화점까지 행진을 했는데 그녀는 머뭇거리다 뒤늦게 혼자서 버스를 타고 나갔다. 버스에서 내려 군중들이 운집해 있는 광장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사람들이 손을 불끈 쥐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5월은 5.18 광주민주항쟁 투쟁일(기념일이라기보다는 투쟁일에 가까운 때였다.)을 앞두고 학내는 더 뜨거워졌다. 아직 이름도 얻지 못한 5.18 광주가 꿈틀댔다. 학생들은 책임자처벌을 요구했고, 당시 책임자인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으며, 방조국인 미국은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백골단에 얻어맞아 쓰러진 광주시민들 사진과 피로 쓴 듯한 절규에 가까운 대자보가 학내를 온통 뒤흔들었다. 학내는 연일 집단 휴업을 했고 공청회와 집회가 이어졌다. 뒤숭숭한 학내 분위기로 수업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수업하는 시간보다 집회에 참여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학생회에서는 광주에 갈 사람을 모집했다. 5.18을 앞두고 해마다 학생들이 차량을 대절하여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로 향하던 학우들은 버스에서 경찰의 검문검색으로 되돌아오기도 하고, 가는 길이 막혀서 중간에 내려서 어렵게 돌아갔다는 무용담도 들려왔다. 처음 광주 망월 묘지에 갔을 때 먹먹함이 지금도 남아있다.

88년 5월 15일 서울대에 다니던 조성만 열사는 한반도의 통일과 주한미군철수, 군사정권 반대, 양심수 석방등을 주장하며 투신했다. 조성만 열사는 전라북도 김제출신으로 전주서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해성고를 졸업했다. 같은 동향사람이라서 그런지 더 신경이 쓰였다. 안경을 쓰고 있는 영정사진 속 열사가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으냐? 진실이 무엇인 줄 아느냐?"라고.


그녀는 고등학교 때까지 줄반장도 해보지 않았는데, 부대표를 한 명 더 뽑아야 한다는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친구가 그녀를 추천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학생회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그녀를 누군가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부대표가 된 그녀는 책임감이 더 커졌다. 과동기들은 학생회 행사에 많이 참여하지 않았다. 선배들로부터 우리 학년이 '단합이 안되네, 개인주의네' 하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낼 정도였다. 게다가 신입생들이 선배를 보면 인사도 안 한다며 불만을 자주 이야기했다. 우리 동기들은 선배들로부터 미운털이 박혔다. 그녀는 예외였다. 그녀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잘했고, 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선배는 걸어 다니는 지갑'이라고 말했는데 인사를 하면 맛있는 것을 많이 사줬다. 특히 2학년 과대표였던 진희 언니는 그녀를 끔찍이 챙겨주었다. 얼굴도 닮아서 마치 동생처럼 여길 정도였다. 그녀는 2, 3학년 여러 선배 언니들과 가까워졌다. 선배들은 친절했고, 순수했고, 멋있었다.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데 농활을 간다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서울에 살던 큰언니가 아파서 방학 동안 한 달 정도 조카들을 돌보았다. 대학교 1학년 첫여름방학을 헛되이 보낸 것 같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농활에 참여했다. 농활은 농촌활동의 준말로, 농민을 돕는 순수 봉사활동이 아니라 농민을 의식화시키고 농민회를 조직화하기 위한 활동이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이 농촌과 공장에 들어가 사람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활동들을 많이 했다. 의식화 조직화 활동의 일환으로 농촌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의대에서도 88년 처음 농활을 갔다. 전북지역에 있는 간호대, 의대, 한의대 등이 연합해서 활동했다. 여섯 마을로 나누어서 들어갔는데 한 마을에는 열댓 명으로 구성되었다. 의대생 동기들이 여섯 명, 간호학과 선배 중 진희언니, 선임언니가 있었고, 의대선배들이 여럿이었다. 간호학과 신입생은 그녀 혼자였다. 그녀는 농활 준비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농활이 진행되는 동안은 열심히 활동했다. 주로 마을에서 콩밭매기, 고추 따기, 채소밭에 김매기, 마을 청소하기, 마을 풀 뽑기, 풀베기 등에 참여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많이 해오던 지라 농사를 잘 알았다. 풀을 벨 때는 낫질을 어찌나 잘하던지 '낫의 여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부모님이 농사짓는데 부모님은 안 도와 드리고 남의 집에서 봉사하는 꼴이라 부모님께는 미안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사 년 내내 농활을 갔다.


농촌활동에는 몸으로 하는 봉사활동 이외에 삼사학년과 졸업한 선배들을 중심으로 의료봉사를 했고 우리나라 의료를 북한의 의료와 비교하는 교육도 했다. 의료봉사는 나중에 빈민촌에서 의료봉사로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졸업해서 의료봉사에 몇 차례 참여했다. 문화활동도 했는데 마당극을 준비하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다. 문화활동이 꽤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사회 현실을 보여주는 의식화 사업을 했다. 광주비디오를 보여주고 정권을 비판하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녀는 마을사람들이 모인 마당에서 처음으로 광주비디오를 처음 보았는데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시민들을 내리찍고,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며 너무 놀랐다.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분노에 찬 열정적인 말을 쏟아냈다. 아무리 초자라지만 농민들을 의식화하기 위해서 온 학생이 그러면 안 되는데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뒤늦게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광주비디오는 진실을 향한 마음에 불을 지폈다.


농활에서 생활수칙은 절대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농민들에게 밥을 얻어먹지 않기, 힘들다고 눕지 않기, 학생들끼리 절도 있게 지내기 등등 매우 철저했다. 학생들은 금욕적인 생활에 가까웠다. 기간은 일주일정도였는데 한여름 뜨거운 떼약 볕 아래에서 무척 힘들었다. 거의 쓰러질 정도였지만 성심성의껏 농촌활동을 했다. 그때 생긴 동지애로 농활이 끝난 이후에는 마을별로 학우들끼리 자주 만나고 가까워졌다. 그때 만난 동기들과 선배들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선임언니, 진희언니, 종환 선배, 채식 선배, 연호 선배 등은 그녀의 대학생활 내내 영향을 주었다. 농민과 학생들의 관계도 좋아서 지속적으로 만났고 축제에도 초대하고 마을에 후속 방문도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학생회 경험에서 이룬 의식화 조직화 방법을 농민들에게 전수했고, 농민들이 농민회를 구성하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학문은 도서관에만 있지 않으니>


농활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2학기가 되면서 학회 구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학우들은 순수하게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원했으나 학생회는 어떻게든 운동권 학생들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선배들의 목적과 달리 그녀는 막연하게 학회활동을 하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어 책을 읽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모습을 꿈꿔왔기 때문에 학회를 만들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동기들 중에 십여 명이 학회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책을 정하고 토론도 몇 번 했다. 처음 하는 독서 토론이라 쉽지 않았다. 이만하면 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선배들로부터 압박이 자꾸 들어왔다. 좀 더 잘 학생들을 의식화시켜서 조직화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선배들은 의예과 학회가 잘 운영되고 있다며 학회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의예과 학회는 이십여 명쯤 되는 것 같았고 토론과 실천도 잘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당시에 대학생 군사훈련으로 진행되던 전방입소교육을 거부하는 투쟁이 있었다. 전방입소 교육은 최전방 군부대에서 받는 1주일 군사훈련으로 교련학점을 취득하는 교과과정이었다. 전방입소는 반공교육을 통해 사회비판적인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했다. 대학 내에서는 전국적으로 이를 거부하는 투쟁이 한참이었다. 의예과 학회는 학습과 토론을 활발히 하고 있고, 전방입소 거부투쟁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의예과 학회를 운영하고 있던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학회 운영에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아는 것이 많아서 사회과학 지식을 쌓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2학기에는 차기 연도 학생회를 구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총학생회, 의과대학학생회, 간호학학과 학생회 등은 서로 자신이 속한 단체 사람이 회장이 되기를 원했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NL계열과 PD 계열로 나누어 있었는데 주로 NL계열 운동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학교 총학생회뿐만 아니라 의과대학 선배들이 NL계열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NL(민족해방파, National Liberation Faction) 계열은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하며, 대한민국의 사회 문제는 반제국주의민족주의에 있다고 보고 사회변혁은 반미주의와 통일로 혁명을 이루려고 했다. PD(민중민주파, People's Democracy Faction) 계열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중시하며 대한민국을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사회변혁은 민중민주주의혁명으로 이룬다고 했다. NL계열은 민족의 모순을 사회의 주요 모순으로 파악하여 민족해방을, PD계열은 계급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보고 민중해방을 주장했다. 지금이야 NL이면 어떻고 PD면 어떠하냐고 말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은 학생회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간호학과 학생회에서도 차기 연도 학생회 구성을 위해서 십여명의 비공적인 모임이 만들어졌다. 선거에서 의대 학생회장에는 연호 선배가 당선되었고 간호학과 학생회장에는 진희언니가 선출되었다. 1학년 내내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2학년 과대표가 되었다.


대학 일 학년 때 만났던 사람들이 그녀의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그때는 몰랐다. 대학교 일 학년 때 있었던 많은 일들이 그녀의 인생철학을 만드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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