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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대학 시절 2

자서전 함께 쓰기 프로젝트

by 하민영

대학 1학년 신입생은 꿈같은 시절을 보냈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새로웠고 호기심을 자극했고 활력이 넘쳤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일들이 수없이 일어났고, 그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순수한 열정이 들끓는 신인류를 만났다.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지식은 강의실이나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와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새로운 사건과 사람들, 새로운 책과 지식들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대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정의란 무엇인가', '진실은 무엇인가'를 향한 갈망은 계속되었다. 그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세상을 향한 마음만큼은 활짝 열렸고 언제든지 세상 속으로 뛰어갈 준비를 조금씩 갖추어갔다. 대학교 2학년 때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1989년 그녀의 대학 간호학생이 벌인 일명 '일용직' 싸움이다. 그 일이 없었다면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도서 <간호사, 무드셀라 증후군처럼, 221~225쪽>에 실린 내용으로 대신합니다.*





대학 2학년은 신입생의 설렘은 누그러지고 새로운 기대가 찬다. 선배로서 뻐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간호학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직업에 대한 부푼 꿈을 갖게 된다. 그런데 간호학은 교양과목과 달리 논리적인 사고나 비판적인 생각이 필요한 과목이 아니다. 무조건 외우고 또 외워야 하는 과목이다. 사회의 영향으로 학생들은 민주적인 수업 방식을 원했지만, 교수에 의한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계속됐다.


2학년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던 것 같다.

“얘들아! 대학병원에서 이번에 졸업하는 선배들을 일용직으로 뽑는대.”

“일용직이 뭐야?”

“임시직보다 못한 일용 잡급직이라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대학병원은 공무원이잖아.”

당시만 해도 대학병원 간호사들은 공무원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정규직 TO(table of organization, 일정한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가 없어서 일용직으로 뽑는대. 일하다가 나중에 자리가 나면 정규직으로 채용한다고 했대.”

듣도 보도 못한 일용직 채용에 우리는 모두 경악했다.

“근데 일용직으로 일하고 월급은 16만 원이래.”

“뭐? 월급이 16만 원이라고? 아니 일용직도 억울한데, 월급 16만 원이 뭐야? 월급이라도 제대로 줘야 하는 것 아니야!”

정규직 급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돈으로 간호사를 채용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였다.


병원 경영진 입장에서는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할 수는 없고, 간호사 인력은 부족한데 정부에서는 더 이상의 인력 확대를 할 수 없다고 하니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방법이 일용직이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일용직과 비정규직이 그리 많지 않은 때인지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비정규직도 문제였지만 저임금은 더 큰 문제였다. 당시 짜장면값이 800원 정도였는데, 간호사가 받게 될 시급은 600원 정도로 짜장면 한 그릇만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병원 경영진뿐 아니라 정부도 병원의 비정규직과 저임금 정책에 대해서 방조하며 손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먼저 나서서 부추기고 있었는지도.


병원이 간호학과 4학년에게 일용직과 저임금을 받아들이라는 요구는 너무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해에는 4학년 선배들에게만 해당하지만, 몇 년 내에는 당장 자신에게도 닥칠 문제였다. 그러니 선배든 후배든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뭐라도 하기로 했다.

간호학과 학생회를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병원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지 방법을 찾아 나섰다. 학년별로 모여서 토론을 했고, 전 학년 공청회도 열었다. 병원과 학교 내 곳곳에 대자보를 붙였다. 며칠 간의 항의에도 대답이 없자 전 학년이 전면 수업을 거부했다. 학교 강의실에 모여서 농성을 시작했다. 거리로 나가서 부당한 현실을 알렸고, 피켓을 들고 병원장을 찾아가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병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병원의 부당한 요구에 항의하는 동안 학교와 교수들은 나 몰라라 뒷짐을 지고 있었다. 사회를 향해서 외치는 학생들만이 애가 탔다. 대학생이 느끼는 현실의 벽은 높고 단단했으며,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다. 지금이라면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서 널리 널리 퍼져나가겠지만 당시에는 학생들의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어느 방송사나 신문사에서도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 주는 곳은 없었다.


수업을 거부하면서 학교에서 철야농성을 하던 때 나는 자취를 하고 있었다. 농성을 벌이느라 집에 들어가지 않은지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학교에 찾아오셨다. 아버지께서 학교에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학생이 된 나에게 “데모를 해도 좋으니 앞에만 서지 마라”라고 당부하셨던 분이다. 아버지는 조금은 안타깝게 나를 바라보시며 한마디 하셨다.

“얘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아버지는 그 말을 남기고 뇌졸중으로 마비가 있는 불편한 몸을 절룩이며 자리를 뜨셨다. 나는 병원이 바라보이는 석양 속으로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언젠가는 변할 거예요. 지금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일지라도 멈출 수는 없어요. 두고 보세요. 낙숫물에 깨지는 바위를 보게 될 날이 올 거예요.’


스무 살의 청춘은 자신의 꿈에 사로잡혀 어른들의 생각과 아버지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했다. 어른들 마음을 어찌 다 알겠는가. 그러나 잘못되고 부당함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잘못된 것에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공적인 결과를 얻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청춘이라면 실패가 눈에 보이더라도 우리가 바라는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젊음과 열정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여겼다. 스무 살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그때처럼 부질없는 외침이 될지라도 같은 선택을 할까? 여전히 정면으로 맞설까? 아니면 회피하고 모르는 척할까?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사회라는 커다란 바윗덩이 앞에서 절망하고 싶지는 않다. 어른들이 관행처럼 만들어 놓은 금단의 벽 앞에서 물러서고 싶지는 않다. 부질없는 몸짓일지라도 하나의 작은 낙숫물이 되겠다는 마음이다. 그것은 어쩌면 젊음의 특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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