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함께 쓰기 프로젝트
대학을 졸업하면서 경제적 독립도 이루어졌다. 부모님께 손을 벌려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일은 없어졌다. 졸업하고 한 달은 쌍방울 메리야스 하청 공장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포장일을 했는데 나중에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이라고 사장님이 익산 본사에 갈 때 데리고 다녔다.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의대선배가 병원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충남 양촌 면내에 있는 의원으로 원장님은 나름 어떤 꿈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몰랐다. 병원에서 가정방문 사업을 하고 싶어해서 마을을 찾아가서 아이들도 만나고 어른들도 만나서 보건교육을 했다. 사업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천에 있는 연합병원을 찾아 방문간호를 견학하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하지 않을 제안을 하기도 했다. 월급을 다른 직원보다 많이 주었는데 똑같이 달라고 해서 모든 직원이 같은 월급을 받았다. 병원 원장님도 청소를 같이 해야 한다고 말해서 원장님도 업무가 끝나면 밀대를 들고 청소를 같이 했다.
팔 개월 정도 웨이팅(대기) 기간이 끝나고 1992년 10월 드디어 모교 대학병원에 입사했다. 1989년에 학생들이 벌인 일용직 반대투쟁은 실패로 돌아갔고, 선배들은 16만 원~19만 원의 급여를 받고 일용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녀가 입사할 당시에는 급여가 조금 올랐으나 공장에서 받던 아르바이트비보다 적었다. 처음 일 년은 정해진 부서가 없이 PRN(필요에 따라 부서를 이동하는 사람)으로 열 군데가 넘는 부서를 옮겨 다녔다. 이십여 군데를 돌아다닌 친구는 퇴사했다. 신입교육이나 부서 발령에 대한 체계도 없던 시절이었다.
대학생 때 일용직 반대투쟁을 했던 선배들은 병원에 입사하여 '참 간호 실천회(약칭 참실)'라는 간호사 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참실 회원이 되었다. 참실에서는 병원내외의 주요한 이슈나 평간호사들의 요구사항 등을 소식지에 실어서 배포하기도 했고,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이기도 했다. 간호사들의 처우 개선이나 부족한 간호사 인력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고, 환자 및 보호자를 위한 건강보험 제도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필요하다면 간호부장이나 병원장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병원에서도 이십 대 젊은 간호사들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소모임으로는 노래패, 풍물패, 역사기행 등이 있었다. 소모임에서는 간호사 선후배들이 소통하고 친목을 도모할 수 있었다. 병원 내에는 간호사 이외에 타 직종에도 일용직 160여 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모여 일용직 노조를 만들었다. 참실의 선배 간호사들도 일용직 노조 건설에 발 벗고 나섰다. 참실에서 활동하는 간호사들은 병원 내에서 인정받는 능력 있는 간호사가 많았다. 믿고 따르고 본받을만한 사람들이었다. 선임언니 영신언니 진희언니 수진언니 혜경언니 은영언니... 이외에도 여러 선배 언니들께 감사^*^ ♡
입사해서 처음 배치받은 부서는 소화기내과 병동이었다. 동아리 선배인 희정언니와 연주언니가 있어서 잘해주었다. 수선생님과 책임선생님도 인자하셔서 일하기도 편했다. 3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기본적인 업무를 배웠다. 이후 이 부서 저부서 돌아다니는 PRN을 했는데 어느 부서에서는 한 달, 며칠 혹은 하루 등으로 일했고 외래와 병동을 가리지 않았다. 신규로 일한 일 년여 기간을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처음으로 픽스(고정)된 부서는 흉부외과와 구강외과 병동이었다. 이 병동에는 학교 선배가 한분 있었으나 편한 선배는 아니었다. 타교 출신 간호사가 세 명이나 있어서 보이지 않는 아니 느껴지는 알력 싸움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병원 내에는 본교 출신과 타교 출신 간의 갈등이 존재한다. 본교 출신의 텃새와 타교 출신의 피해의식, 승진에서의 불평등, 기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그녀는 타교 출신 선배들과도 잘 지냈다. 일도 잘하고 믿고 따를만한 타교 선배가 있었다. 수선생님은 일을 잘하기는 했지만 의사들과의 관계에서 약간 밀고 당기는 느낌이 있었다. 간호사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의사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도 있었고, 의사들도 간호사를 존중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의사와 간호사간의 업무 분담과 책임성을 따지는 문제가 종종 발생한다. 과거 관습에 의해서 의사가 간호사를 하대하는 경우도 있다. 수간호사와 해당과 과장(의사)과의 관계에 따라서 병동 분위기가 판가름 나기도 한다. 분위기는 과마다 차이가 있다.
그때는 신입 간호사에 대한 교육이 거의 없어서 배치를 받자마자 현장에 투입되었다. 45명 정도의 환자를 두 명의 간호사가 돌봐야 한다. 처음 입사 할 때 간호체계는 부족한 인력일 때 주로 실시되는 펑셔널(기능적) 체계로 액팅간호사와 차지간호사가 구분되어 있었다. 액팅간호사는 주로 주사, 활력징후, 수술환자 처치 등을 주로 맡고, 차지 간호사는 주로 기록, 환자 이송, 전실 등 서류 업무를 한다. 후배간호사가 주로 액팅을 하고 선배간호사가 차지를 한다. 부족한 인력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업무 수행자와 서명자가 다른 것은 문제로 지적되었다. 나중에는 팀제로 운영하면서 간호사 인력이 늘어났고 각자 맡은 팀을 한 사람이 기록과 수행이 일치하게 되었다.
신규간호사 교육을 맡는 선배간호사는 매일 근무표에 따라 달랐다. 따로 교육간호사가 있던 때가 아니었다. 신규간호사는 두세 달간 여러 선배간호사로부터 트레이닝을 받고 독립하게 된다. 밑으로 다른 후배 신입간호사가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독립하기도 한다. 일이 적은 휴일에는 후배간호사를 데리고 근무한다. 점차 그 횟수가 늘어나면서 단단하고 능력 있는 간호사로 발전하게 된다.
처음 배치받은 병동에서 이 년 정도 일하고 새로운 병동이 오픈하면서 부서 이동을 했다. 재활의학과와 신경과 병동이었다. 이때부터는(1995년) 팀제 간호가 이루어졌다. 간호사 수도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신설 병동이어서인지 의사와 간호사간 분위기가 좋았다. 서로 협조적이었고 존중했으며 팀플레이를 중요하게 여겼다. 간호사들 간에는 수 샘만 제외하면 모두 화합도 잘 되었다. 수 샘이 성격이 독특해서 간호사들에게 화도 잘 냈고, 편해가 심해서 근무표에 드러났다. 미워하는 사람은 주말마다 밤근무를 시켰고, 예뻐하는 사람은 주말마다 휴일을 주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주로 휴일에 쉬게 되었다. 간호사에게 주말, 명절날, 연말연시 등 휴일이 중요하다. 남들처럼 쉴 때 쉬고 일할 때 일하고 싶은 욕구가 많다. 그러다 보니 주말마다 일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기쁨이 줄어들고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는 일이다.
이후 이 년 정도 일하고 응급실로 발령이 났다. 응급실은 매우 바빴다. 특히 일반 병원이 열리지 않는 주말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응급실에 있는 보조 침대를 다 쓰고도 모자라 매트를 바닥에 깔고 환자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는 매트도 없어서 매트를 서로 차지하려고 환자들끼리 다투는 일도 생겼다. 밤근무가 끝나고 도저히 걸어갈 힘이 없어서 잠깐 소파에 누웠다가 잠이 들었는데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번쩍 눈을 뜨기도 했다. 응급실에서는 8개월을 근무했다. 노동조합 상근(사무장)으로 일하게 되어 노조로 이동했다.
병원 근무에서 가장 힘든 것은 3교대 근무다. 젊었을 때는 몸이 빨리 회복되는 편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적응이 어렵다. 특히 밤근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된다. 20대에는 젊어서 밤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하고, 낮에 집회다 시위 등을 쫓아다녀도 할만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임신과 육아, 살림까지 하면서 밤근무를 하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밤근무(나이트)가 힘들기는 해도 밤근무에 대한 추억은 가장 많다. 야식으로 먹는 컵라면, 치킨, 보쌈, 떡볶이 등도 많이 먹었다.(결혼하여 육아를 할 때는 시어머니께서 야식 도시락을 싸 주셨다.) 당시에는 수기로 레지던트가 처방을 내면 인턴이 먹지를 댄 처방을 써준다. 이때 의사들과도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요즘은 전산으로 하기 때문에 이런 풍경은 없어졌다. 처방전을 약국에 보내고 약카드를 만들고 다음날 이루어질 수액과 약을 받아서 분류한다. 낮에 이루어질 수술과 검사등에 대한 준비도 밤에 했다. 3교대 중 밤근무는 가장 길었고 여유가 있어 간호사들 간에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이 하여 친해지기도 한다. 일이 조금 일찍 끝나면 스테이션에 엎드려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임신해서 쪽잠을 잘 때면 어르신들이 "쯧쯧쯧" 혀를 차면서 "얼마나 벌겠다고 이러누." 하곤 했다. 걱정되어하시는 말씀이었지만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낮에 자는 잠은 생각보다 깊은 잠을 이룰 수 없다. 밖이 너무 환하고 소란스럽기도 하다. 생체리듬이 밤에 잘 것을 권한다. 밤근무 끝나고 중앙동에 있는 왱이집이나 남부시장에 있는 국밥집에서 먹는 콩나물 국밥이나 순대국밥은 밤새 지친 몸을 확 풀어주었다.
이브닝(오후) 끝나고도 추억 쌓기는 좋다. 응급상황만 없다면 어려운 일이 많지 않고 바쁘지 않게 일할 수 있는 근무다. 젊은이들에게는 이브닝이 가장 선호할 만 하나 저녁때 친구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이 단점이다. 이브닝은 10시 반쯤 끝나는데 젊을 때는 팔팔한 체력상태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근무 후 배고픔도 달래고 동료들과 친밀감도 높일 수 있는 술집으로 향한다. 젊은 의사들도 함께 하는데 너나없이 즐겁게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때 자잘한 썸도 생긴다. 이브닝이 끝나고 송광사 벚꽃길을 걸었던 때도 있었고, 눈오는 밤 정읍까지 갔던 때도 있었다
데이(오전)는 밤근무만큼이나 체력적으로 힘들다. 3교대 근무로 리듬이 깨져서 아침 5~6시에는 일어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업무량도 가장 많아서 정신없이 바쁘다. 수술을 보내고, 검사를 하고, 전실이나 전동을 하고, 입원과 퇴원 환자를 관리해야 한다.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녀야 한다. 데이를 하고 나면 파김치가 된다. 데이는 활동하기는 좋지만 몸이 힘들어서 젊었을 때는 기피하는 근무였다.
병동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업무도 있지만 집담회나 회식도 꽤 많은 편이다. 과마다 조금씩 다른데 의사들과 집담회를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과도 있다. 의사들과 하는 과 회식에는 불편하기는 하지만 맛있는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약회사에서 제공하는 회식은 소고기로 목 때를 벗기는 날이다. 간호사만 하는 컨퍼런스(집담회)는 한 달에 한번 정도 한다. 질병 관련 교육을 하거나 논의할 사항이 있으면 회의도 한다. 집담회가 있을 때 나이트도 참석해야 해서 부담이 된다. 특히 중간 나이트(연속 삼일 밤근무를 하면 2,3일 차를 이른다)에 컨퍼런스가 있으면 퇴근해서 네다섯 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이때는 밤근무가 죽을 맛이다. 이외에도 간호부 차원의 교육이나 보수교육도 많다. 이에 대한 고려나 보상이 없는 것이 아쉽다.
병원생활은 힘들지만 보람 있는 일이다. 환자가 회복되어 퇴원하는 모습을 보면 여간 즐겁지 않다. 힘든 일도 있다. 뜻하지 않게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에는 견디기 힘든 자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의료사고나 투약오류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해서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다. 3교대 근무, 부족한 인력문제도 간호사의 생활을 어렵게 한다. 경직된 조직문화로 소통의 어려움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이 멋지다. *
*도서 <간호사 무드셀라 증후군처럼>을 읽어보시면 간호사 생활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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