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함께 쓰기 프로젝트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돈을 벌고 부모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푼다. 하지만 학교와 다른 사회의 벽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기도 한다. 시대마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에게 주어지는 과제도 다르다. 사람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과제도 있다. 그녀가 살았던 이십 대는 민주주의와 IMF시대로 대변된다.
1990년대의 시대적 과제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어렵게 얻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제가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일이었다. 대통령제와 지방자치시대 등 민주주의가 사회 전반에 스며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직장 내에서는 노조를 건설하고 노동자들의 요구가 잘 반영되도록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또, 사회는 예견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희망에 들 뜰 시기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1997년 12월 3일 대한민국은 IMF라는 국제통화기금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나랏빚이 1,500달러에 이르면서 IMF에 달러를 빌려야 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IMF의 통제를 받는 나라로 신자유주의라는 격랑에 휩쓸리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사회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개인은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녀가 이십 대에 살아간 방식은 <간호사 무드셀라 증후군처럼>* 책 내용을 일부 소개해본다.
1992년 대학을 졸업했던 당시, 어쩔 수 없는 처지 때문에 형편없는 근로조건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우리들의 ‘계란으로 바위 치기’는 병원에서도 계속되었다. 현실의 벽은 높고 단단했지만 부당함을 무조건 참고 견디지는 않았다. 먼저 졸업한 선배들을 중심으로 간호사의 어려운 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했다. 노조도 없던 시절이라 선배들은 간호사 모임을 만들었다. 비정규직과 저임금 문제뿐만 아니라 간호사들의 부족한 인력 수급과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환자의 안전 문제, 의료제도의 문제, 비민주적인 의사결정 등 병원 내외의 여러 가지 문제를 개선하고자 했다. 당시에 간호사 모임을 이끌었던 선배 언니가 모임이 만들어진 계기를 설명했다.
“우리 모임 이름이 ‘참 간호 실천회’ 약칭 ‘참실’이라고 불렀잖아. 그때 모임을 만든 것은 간호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 기억날지 모르겠는데, 간호사 폭행 사건 기억나?”
“아니.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정확히는 몰라... 이야기해 줘.”
“그때 병동에서 간호사 폭행 사건이 났어. 처음에는 레지던트와 간호사 간의 다툼이 있었어. 그런데 다투는 와중에 레지던트가 청진기로 간호사의 목을 조른 거야. 폭행 사건이 벌어졌는데, 당시에는 폭행한 사람에 대한 처벌 규정도 병원 내규도 없는 거야. 유야무야(有耶無耶) 묻히려고 했지. 그래서 ‘참실’을 중심으로 대자보를 붙이고 간호부장과 병원장을 찾아갔어. 우리의 요구는 폭행 사건 당사자의 공개 사과와 징계, 폭력 사건 지금도 간간이 병원 내에서 벌어지는 폭행 사건 관련한 기사가 오르내린다.
“간호사들이 대강당에 다 모였다. 결국, 그 레지던트가 공개적으로 사과했고, 일 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을 거야. 병원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어.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우리는 존중받고 배려를 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가 있는 거야.”
다른 선배 언니는 또 다른 일을 떠올렸다.
“이런 일도 있었잖아. ‘참실’에서 간호사들이 근무 시작 전에 주사약을 미리 준비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어. 간호인력이 부족하니까 간호사들이 출근하기만 하면 주사제를 다 미리 준비해 놓았어. 주사기도 다 까놓고, 생리식염수를 주사기에 재어 놓았지. 오구멘틴이라는 항생제는 믹스(mix)해 놓으면 갈색으로 변하는데도 섞어서 주사기에 재어 놓았잖아. 인력이 부족하니까 바쁘지 않을 때 미리 준비해 놓았던 거지. 우리가 그때 주사제 미리 준비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환자 수 대비 간호사 수를 지키라고 요구했잖아. 그때도 환자 대비 간호사 수 규정은 있었어. 그것을 지키라는 요구였는데, 엉뚱하게도 소식지에 ‘환자는 거의 맹물 같은 주사를 맞는다.’는 표현이 잘못되었다며 간호부에서 우리를 나무랐지. 본질은 어딘가로 날아가고 우리의 소식지 내용이 잘못됐다고 했어. 그리고 뒤늦게 간호업무 파악을 한다며 뒷북이었지.”
선배들이 만든 간호사 소모임은 간호사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병원 내 여러 문제를 다루었다. 소식지를 발간하여 타 부서와도 소통했고, 간호사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병원장이나 간호부장을 찾아가 면담을 하거나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친목 도모를 위해 노래모임과 풍물패, 편집부, 역사 기행 등의 활동도 했다. 연말에는 노래자랑이나 영화 상영을 통해서 전 직원뿐만 아니라 환자 보호자와 함께 하기도 했다.
1997년 김영삼 정부 말기에 우리나라는 IMF 경제 위기를 맞았다. 노동자의 위기는 나라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나라가 어려운 시기일수록 노동자의 삶은 더 각박해졌다. IMF로 인해 더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전락했고,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로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고용불안과 불평등은 심해졌고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다. IMF의 영향은 국립대 병원에도 불어 닥쳤다. 나라 위기에 동참해야 한다며 고통 분담을 강요했다. 기존에 지급하던 각종 수당을 일방적으로 지급하지 않는 등 실질 임금이 삭감되었다. 나이 많은 고임금자의 명예퇴직을 유도했다. 일방적인 정리해고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인간의 삶이란 사회·시대적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시대의 흐름은 가끔 사람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간다. 선배 언니 중 눈물 많고 마음이 무척 여린 언니가 있다. 그런 언니가 한때 노조위원장을 했다. 노조위원장 하면 다부지고 강단 있으며 무척 센 사람을 떠올리겠지만 언니는 그런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분만휴가가 끝나서 병원에 출근했는데, 나보고 노조위원장을 하라더라. 노조위원장만 하면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한다는 거야. 얼떨결에 노조위원장이 되었지.”
선배 언니는 간호사 모임과 여러 소모임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노조위원장은 생각지도 않았단다. IMF 당시 선배 언니는 노조위원장이었고 나는 사무장이었다. 노조와 병원은 몇 달 동안 단체 협상을 진행했지만 좀처럼 타협을 보지 못했다. 병원 경영진은 정부와 타 국립대 병원의 눈치를 살폈다. 정부에서는 임금협상 및 근로조건 등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노동조합도 단위 노조의 요구가 있었지만, 보건의료노조 전체의 흐름과 방향이 있었기 때문에 섣부른 결정을 하지 못했다. 서로가 눈치 보기를 하며 좀처럼 협상을 진행하지 못했다. 노조 대표였던 우리는 파업이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고 일찍부터 파업을 준비했다.
무엇보다 파업의 정당성을 알려야 했다. 조합원의 찬성을 얻어야 했고, 직원들의 암묵적인 동의와 지지가 필요했다. 환자와 보호자, 국민에게도 노조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원 곳곳을 누비며 조합원을 만났다. 유인물을 나눠주고, 게시판에는 대자보를 붙이고, 병원 밖에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우리 병원뿐 아니라 타 병원 조합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방법을 논의했다. 지역의 여러 노동조합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했다. 민주노총 소속 여러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으며 일을 진행했지만 처음 하는 병원 파업은 두렵기만 했다. 매스컴과 적극적인 인터뷰를 통해서 우리들의 의지와 요구를 알렸다. 매스컴에 거는 기대는 노조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보다는 비난받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은 조합원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단계부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가슴에 리본과 배지달기, 단체티셔츠 입기, 연차휴가 투쟁 등을 진행했다. 점심시간에는 현관 앞에 모여서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전단을 나눠주거나 협상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파업은 조합원이 참여하는 가장 높은 단계의 단체행동이다. 파업을 위해서는 조합원 찬·반 여부를 물어서 진행해야 한다. 병원 노동자들이 파업 찬반투표에 찬성을 했다고 해도 실제 단체행동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IMF 사태라는 국가적 경제 위기 속에서 노동자들이 저항할 방법은 파업이라는 단체행동뿐이었다. 노동조합원으로서 간호사가 갖는 부담도 만만치 않지만, 노조위원장이라면 부담과 책임이 더 클 것이다. 노동조합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선배 언니는 당시 어땠는지 물었다.
“노조를 시작할 때 IMF가 터졌잖아. 노조에서 파업을 하기로 한 날 새벽 1시까지 병원 측과 협상했어. 그런데 협상이 결렬되었지. 파업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파업하기로 한 새벽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우리 병원 역사상 처음으로 파업을 했잖아.”
선배 언니는 당시 시부모님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압박을 받으면서 노조를 이끌었다고 했다. 그러나 개인 사정과 어려움은 잠시 접어두었다. 잘하든 못하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 일이 자신에게 주어졌으며 스스로 그 일을 선택했다. 노동조합을 이끌면서 갈등 상황도 많았고 미숙한 점도 있었지만, 겁 없이 달렸다. 선배 언니는 여러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했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두렵지만 자신과 서로를 믿고 그냥 앞으로 나가는 것이지. 후배들은 선배들이 있어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고, 선배들은 후배들이 있었기에 든든했어.”
그녀는 20대에 젊음을 무기로 시대적 과제에 당당하게 맞섰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간호사 모임을 이끌었던 선임언니, IMF 시기에 노동조합 위원장을 했던 영신언니 같이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나갔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뿐만 아니라 함께 했던 윤정, 인순, 원실, 선영, 영진, 은영, 은하, 미경, 선수, 혜련, 성미 ... 등 많은 후배들이 있었으며, 지지해 주고 후원해 준 동료들과 회원 및 조합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자리를 빌어 선배, 후배, 동료, 회원, 조합원들께 감사드린다. 더불어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모든 사람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도서 <간호사 무드셀라 증후군처럼>을 읽어보시면 간호사 생활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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