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함께 쓰기 프로젝트
뚜루루 ~~~ 뚜루루~~~
칠 인 칠색 하나만 회원들은 이십 대를 어떻게 보냈을까?
자서전 함께 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회원들의 이십 대는 어땠을지 나눔 하는 시간을 가졌다.
혜령님은 19살에 포항에서 울산으로 와서 태광산업에 취업했다. 이모집에 잠자는 방을 얻으러 갔는데 그곳이 시이모 집이였고 시이모집에 시어머니가 자주 오셨는데 그 때 시어머니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여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소개팅을 하고 싶지 않아서 늦게 들어갔는데 남자가 안 돌아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와 연이 닿아 스무 살에 결혼했다. 결혼해 보니 큰 시어머니와 작은 시어머니로 시어머니가 둘이었다. 큰 시어머니가 아기를 못 낳아서 작은 시어머니에게서 아들을 보았다. 큰 시어머니는 그녀 집으로 와서 살았다. 그녀는 밥을 할 줄 몰라서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었는데 삼층밥이었다. 철이 없어서 성실하고 모범생인 남편에게 출근하지 말고 놀아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행복한 일상이었다. 딸을 낳고 얼마 안 되어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특이하게도 시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노래를 많이 불렀다. 나중에 친정아버지도 돌아가실 때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죽을 때는 다 노래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행복숲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직장생활을 했고 또 한 해는 재수생활을 했다. 이년 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나이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빡빡한 유아교육과 학사 일정에도 꿈을 향해 도전하며 죽을 만큼 노력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열심히 공부도 했지만 미팅을 주선할 정도로 뚜쟁이 역할도 했다. 엉뚱한 면도 있어서 친구들을 꼬드겨 수업을 빼먹고 낙화암에 놀러 간 적도 있었다. 교수님들께 네가 그럴 줄 몰랐다며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교수님 추천으로 당진에 있는 성당 유치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주일학교 선생님 경험이 있어서 수업을 준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이들은 그녀의 수업을 재미있어했으며 그녀를 좋아했다. 이십 대 직장생활은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이었다.
어게인채님은 이십 대에 도배, 사과장사, 과외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십 대에도 과외를 했고 지금도 학원을 운영하고 있어서 지금까지 만나온 학생들 이야기만 묶어도 책 한 권이 넘을 것 같다고 했다. 이십 대에는 주로 중. 고등학생만 과외를 했는데 한 번은 초등학교 2학년 과외를 한 적이 있다. 부잣집이었고 눈높이 문제집과 학교 숙제만 봐주면 되는 꿀 알바였다. 돈을 많이 주었는데 괜히 미안해서 몇 달 하고 중단했다. 또 한 번은 부모님이 염색공장을 하던 학생을 과외한 적이 있다. 집안이 어려워져 학생이 시무룩할 때 개그로 웃겨주며 마음을 풀어주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그를 잘한다. 학생은 나중에 집안 사업이 부도가 나서 중단하게 되었다. 사과장사 아르바이트 할 때는 대목에 할아버지 한분이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는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허름한 복장이라 한두 박스 사겠거니 했는데 중소기업 사장님으로 서른 박스를 사셨다. 그때부터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달팽이천사님은 대학 때 미팅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학교가 끝나면 먹거리를 사서 반찬을 만들고 집안일을 하며 동생 세명을 돌봤다. 동생들이 공부를 잘하면 칭찬을 하고 회초리로 때리기도 했다. 아빠는 오수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셨고, 엄마는 밤 은행 산수유 등을 수확하고 밭농사. 논농사를 짓고 양계장도 하셨다. 엄마는 머슴처럼 일했는데 자신은 엄마가 행복할 때 제일 행복했다. 첫 직장은 전주 성심유치원이었다. 1979년에 결혼했는데 이모 소개로 맞선을 봤다. 결혼상대자로 자신의 기준은 서울에 살 것, 키 크고 잘생길 것, 4년제 대학을 나올 것 세 가지였다. 다행히 그런 사람을 만나 약혼을 하고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데이트를 했다. 한 번은 약혼자가 소주 여섯 병을 먹고 쓰러졌는데 전주에서 서울로 택시를 태워 보냈다. 당시 월급이 10만 원이었는데 택시비가 8만? 원이었다. 서울에서 데이트할 때는 명동에서 파마를 하고 통닭도 먹었다. 유치원이 방학했을 때 일주일간 서울에 있는 신랑집에서 보냈다. 그때 역사는 이루어졌다. 큰 공장을 운영하고 아파트에서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대를 하고 갔는데 신랑집은 좁고 긴 골목길에 있었는데 전주에서도 듣도 보도 못할 정도로 허름한 집이었다.
이보부상님은 인생에는 타이밍이 있고, 세 번에 기회가 온다고 생각한다. 이십 대에 부모님이 회사 매점을 입점하여 운영하게 되었는데 온 가족이 매점일을 도왔다. 자신은 일을 마치고 퇴근하여 매점에서 밤 12시까지 부모님을 도왔고, 매점방에서 잠을 자면서 일을 했다. 매점 낙찰을 받았을 때 이등과 천 원 차이였다. 낙찰을 받고 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럴 줄 몰랐다느니,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느니' 등의 비난을 받았다. 자신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으나 때로는 나쁜 사람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매점은 장사가 잘 되었다. 그리고 돈 쓸 시간이 없어서 돈을 모았다. 매점은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그 길에 벚꽃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북수다님은 1997년 고3 때 숙식을 제공하는 서울에 취업을 했다. 고흥에서 기차를 타고 용산에서 내려 의정부에 있는 슬라브 지붕 집에 도착했다. 처음 공장에 취업을 했으나 때마침 IMF가 터져 몇 개월 다니지 못하고 쫓겨났다. 그 후 5년간 여러 직장을 옮겨 다녔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퇴직금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민영님은 대학 때는 학생운동을 졸업하고 병원에 입사해서는 보건의료노조운동을 했다. 이십 대에 나라의 민주주를 위해 열정을 바쳤다. (*자세한 내용은 브런치 20~21화를 참조해 주세요.)
삶의 위치는 모두 다 달랐지만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이다. 어느 누구도 쉬워 보이는 인생은 없었다. 행복해 보이는 인생 뒤에 어느 순간 어려움이 찾아왔다. 기쁨은 잠깐이고 여러 고난이 줄을 이었다.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때로는 헛다리를 짚은 듯하여 지뢰밭을 지날 때처럼 조심스럽게 지나야 할 때도 있었다. 가끔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진 말을 들어도 참고 견뎌야 했다. '쓸 시간이 없어서 돈을 모았다'는 이야기처럼 열심히 일만 하며 지냈던 시기도 있었다. 모두 청춘의 이름으로 영혼을 갈아 넣어서 살아온 인생이다.
서로를 알기 시작한 지는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있고 사 년째인 회원들도 있다. 그동안 일기모임과 블로그 모임을 통해서 글 나눔을 많이 해왔던지라 자서전을 나누는 것이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여전히 주저하는 마음이 있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이런 이야기는 창피한 일인데? 이건 너무 잘난 체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에 선뜻 나서기가 어렵다. 그래서 글을 쓰고 남에게 보여주는 일은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보여주고 싶은 만큼 보여주면 됩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주세요."
회원들에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온라인에서 회원들과 자서전 나눔과 브런치스토리에 업로드하는 이야기는 딱 이 정도로만 보여주려고 한다. 자기만 보는 자서전이나 일기는 자유롭게 어떤 글이든 쓰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글은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보여주면 된다. 다 보여주기도 어렵고 다 보여줄 필요도 없다. 남에게 보여주는 어떤 글이라도 딱 그 정도면 된다. 딱 그만큼이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이야기 나누는데 어려움이 없다.
회원들 인생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재밌다. 삼십 대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증하다. 드라마 인간극장의 마침음이 울려 나오는 듯하다.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
#하나만 #라라크루
#딸아행복은 여기에 있단다_엄마에세이
#간호사무드셀라증후군처럼_간호사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