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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임신과 출산

자서전 함께 쓰기 프로젝트

by 하민영

사랑이 인연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자신이 찾던 배우자인지 아닌지 따져보고 물어보고 생각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종소리를 듣는다고 하는데 어떤 느낌이 순간순간 다가와 가슴에 딱 꽂히는 것이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듯 어느 날 문득 찾아와 갑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어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혹은 이론적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연이 닿았다고 여겨질 뿐.

그녀는 사랑의 인연으로 결혼에 이르러 서른 하나에 딸을 낳았고 서른셋에 아들을 낳았다. 임신은 힘들고 출산은 더 힘들고 육아는 더더더 힘들었다. 남편은 딸을 낳던 해와 아들을 낳던 해에는 같이 살았고, 나머지는 내내 주말 부부를 했다. 시댁이 가까워 시부모님과 동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결혼을 하면 미혼일 때와는 다른 책임감과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결혼 전에는 자신의 한 몸만 보살피면 되지만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부모로서 중요한 책임과 역할이 주어진다. 부모가 되는 순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며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여행을 기꺼이 감내하느냐 즐겁게 떠날 것이냐 혹은 그렇지 않을 것이냐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성스러운 아이의 탄생


그녀는 그 남자와 헤어지기 싫어서 결혼했다. 지금은 서른하나에 결혼한다고 하면 늦다고 할 수 없으나 2001년에는 늦은 나이였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친구 중에는 '네가 결혼할 줄을 몰랐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폭설이 내리던 날 결혼을 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주례를 서 줄 분이 송광사 쪽에서 나오지 못해서 결혼식 당일에 급하게 주례 선생님을 바꾸기도 했다. 첫날밤은 코아백화점에서 잤고, 다음날 호주로 신혼여행을 갔다. 같이 여행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신혼부부로 여섯 쌍이 한 차로 여행을 다녔다. 캥거루, 코알라, 유칼립투스 등을 처음 보았다. 호주에 사는 남편 선배를 만나기도 했다.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결혼하자마자 임신이 되었다. 입덧은 심해서 임신초기에 거의 먹지 못했다. 롯데리아의 새우버거만 먹었다. 냄새 때문에 냉장고 문도 열 수가 없었다. 신경외과 병동에서 일할 때였는데 아침에 환자들의 식사 냄새는 역겨웠고, 침대보를 교체하는 일은 힘이 들어서 머리가 핑핑 돌았다. 지금은 임신한 사람은 야간근무를 빼주지만 당시에는 임신한 사람도 야간근무를 했다. 가끔 환자나 보호자들이 혀를 차며 '얼마나 번다고' 말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던지. 택시를 탔을 때 기사님이 첫아이라고 하니까 "첫아이 때가 가장 행복한 때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공감했다.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잠자기도 힘들고 허리도 아파서 힘들었지만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행복했다. 몸이 고생을 해서인지 막달까지 8kg 증가했고, 아이는 3.1kg으로 태어났다. 예정일보다 보름 일찍 태어났는데 양수가 새서 유도분만했다. 출산 전에는 출산과정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었는데 순산했다. 출산 후에는 변비로 고생해서 아이를 낳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응애'하고 울었을 때는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아이를 안았을 때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이의 탯줄을 아빠가 끊어주는 세리머니가 있었는데 아이 탯줄이 약해서 저절로 끊어졌다고 한다. 조금만 늦었으며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는 뒷이야기도 했다. 아이는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으나 무럭무럭 잘 자랐다. 첫아이는 휴직을 하고 아이를 키웠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슴이 설렜다.


둘째는 첫 아이 모유 수유 중에 임신이 되었다. 생리가 없어서 생각지도 못했는데 임신이 되었다. 첫 아이가 아직 애기인데 동생을 봐야 한다는 미안함이 있었다. 둘째의 태교는 큰 아이 육아 겸 태교 겸 덤으로 했다. 다행히 둘째는 입덧도 없고 아무거나 잘 먹었다. 몸무게는 막달까지 11kg 불었고 아이는 2.7kg으로 예정일보다 한 달가량 일찍 태어났다. 첫아이 육아휴직 후 복직해서 혈액종양 내과로 PRN(일명 필요한 부서에 임시적으로 배치되는 간호사)으로 석 달을 일했다.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병동이라 일은 힘들었다. 하루 걸러 한두 명씩 환자들이 사망했는데 너무 우울했다. 일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았다. 아침 7시에 출근하는 데이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이브닝 근무 중에 이십 대 여자 당뇨환자가 난동을 부리다가 침상옆에 세워 둔 산소탱크가 넘어지면서 산소가 샜다. 임신 중이라 무서워서 옆에 가지도 못했다. 환자 중 한 분이 산소통을 잠가줘서 일단락되었는데 그때부터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첫아이는 유도분만을 했기 때문에 진통이 어떻게 오는지를 몰랐다. 20분 간격으로 진통이 와서 산부인과에서 일하고 있던 동서에게 연락하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산부인과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중에는 5분 간격으로 진통이 왔다. 진통간격이 빨라지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생땀이 나고 견딜 수 없었다. 분만대에 옮겨지고 양수가 터지고 아이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아가야 엄마와 함께 힘을 써보자'라는 생각을 했는데 쏙~~ '응애응애'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병원에 도착한 지 세 시간 만에 둘째를 출산했다. '이렇게 조그만 아이가 내 배속에 있었다니...' 신기하다.


'지혜롭고, 당당하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간호사라서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고 아이를 돌보는 방법은 조금은 익숙한 편이었다. 하지만 직접 부닥친 현실은 달랐다. 아이가 건강하게 잘 지낼 때는 괜찮았으나 이유 없이 울고, 열이 떨어지지 않을 때는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답답했다. 답답하다 못해서 화가 났다. 열이 나서 응급실을 가서 방광에 바늘을 찔러 소변검사를 할 때는 눈물이 났다. '간호사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기 자식에게는 냉정하지 못했다.

첫 아이 키울 때는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지 않고 혼자서 아이를 돌보니 힘든 일을 혼자 떠안았지만 기꺼운 마임이었다. 아이와 둘만의 시간이 좋았고 둘만의 시간을 즐겼다. 아이가 너무 예뻐서 어쩔 줄 몰랐다.


복직할 때 아이가 엄마 바지를 부여잡고 "엄마 가지 마."라며 울 때는 가슴이 미어졌다. 엄마가 가고 난 후 바로 울음을 그친다고 했으나 엄마가 없는 동안 엄마의 바지를 부여잡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는 애착 수건이 있었는데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가지고 다녔다. 복직을 앞두고 있었으면 이후 양육자인 조부모님 댁에 자주 갔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도 했다. 아이와 둘만의 시간이 너무 좋아서 독점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했나 보다. 아이가 겪을 분리불안을 생각을 생각하지 못했다. 큰 아이는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동생을 보면서 불안은 더 심해졌다. 젖을 먹이고 있을 때 동생을 떼내려고 엄마와 동생 사이를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18개월에 할머니가 "이제 동생 봤으니 젖병은 그만 먹자."라고 한마디 했는데 그 이후 젖병을 찾지 않았다. 억지로 뗀 것은 아니었는데 아이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이가 너무 순해서 그랬다. 그러지 말 것 그랬다. 아이의 불안한 마음을 생각하면 더 오래 빨도록 했어야 했다.


15개월 만에 동생을 봐서 큰아이에게는 늘 미안했다. 큰아이도 아기인데 동생까지 생겨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했다. 작은 아이도 누나에 치여서 힘들었겠다. 남매는 사이가 좋았다. 큰아이는 동생을 끔찍하게 챙겼고 동생은 누나를 잘 따랐다. 큰 아이는 중학교 일 학년 때까지 동생을 친구 생일파티에 데리고 갈 정도였다. 아이들이 대여섯 살 때쯤 전북 도립 미술관 놀이터에서 놀던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수십 명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는데 동생은 누나를 눈으로 좇으며 놓치지 않고 금방금방 찾아냈다. 아이의 눈길은 늘 누나에게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보게 되었다.


둘째 아이를 낳은 후에 삼 개월 분만 휴가를 하고 바로 복직했다. 본 병동인 신경외과 병동으로 돌아가기 전 3개월은 PRN으로 신경계 중환자실에서 근무를 했다. 중환자실은 두세 명의 환자를 돌봤지만 중환자이고 인공호흡기 등 배울 것이 많아서 힘들었다. 그래도 병동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희망이 있어서 일을 했다. 하루는 퇴근해서 보니 할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있었다. 고추가 아프다며 몇 시간째 울고 있다고 했다. 이유가 없어 보였는데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서 울음을 그쳤다. 할아버지는 둘째에게 "내가 업어서 키웠으니 너도 나중에 나 업어줘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아이는 그러겠다고 했다.


아이 둘을 육아하면서 직장 생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주말부부였기 때문에 주중에는 남편이 없어서 시댁을 오고 가며 아이를 돌보는 것이 힘이 들었다. 아이가 하나일 때와 둘일 때는 달랐다. 휴직하여 아이만 돌볼 때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육아를 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삼 교대 병원 근무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시댁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줘도 육체적으로 고달팠다.

부모가 되는 것은 힘들었지만 아이들이 잘 커주기를 바랐다. 아이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느냐고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는 '당당하게' 엄마는 '지혜롭게' 둘다 '건강하게' 자라기를 희망했다.


엄마가 된다는 설렘과 긴장, 기대와 희망을 일기장에 실어


엄마가 된다는 가슴 뛰는 설렘과 긴장,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덜컥 아이가 생기고 보니 겁이 났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데 부모가 되는 것이었다. 부모 교육이라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고, 어떤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못했다.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만 들떠서 부모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지금이야 부모교육 있지만 몇십 년 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결혼하여 아이가 생겨서 당연하게 부모가 되는 것이었다. 부모!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


당시의 두려움과 기대 등을 일기장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기장은 아이와 함께 성장하면서 점점 채워갔다.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결혼할 때쯤 선물하려고 꼼꼼하게 작성했다. 아이가 얼마를 먹고 얼마나 자주 깨고 뒤집기는 언제 했고 엄마라고 언제 불렀고 두 발로 설 때는 언제였는지 등 아이의 성장을 자세히 기록했다. 2001년 4월 쓰기 시작한 일기장 몇 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장>

아이와 엄마의 대화


아기 : 똘똘이

엄마 : ㅇㅇ이

아빠 : ㅇㅇ이


<두 번째 장>

나의 선언문!

나, ㅇㅇㅇ은

매우 유능한 여성입니다.

나, ㅇㅇㅇ은

매우 유능한 여성입니다.

나, ㅇㅇㅇ은

매우 유능한 여성입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안일과 무기력을 이겨내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하기만 한다면 못해낼 것이 없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항상 새롭게 도약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게으르게 하지 x) 하겠습니다.


<세 번째 장>

우리 아가와 만난 지 11주째이다.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만남이다. 아직까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아기는 가끔 피를 흘리기도 하고, 엄마가 토하거나 매스껍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하고 힘들다. 밤이면 잠이 잘 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도 엄마는 참 기쁘다. 조금씩 조금씩 아기가 엄마에게 적응하면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고맙다! 아가야!

건강한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을 때까지는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자꾸나!

그때까지는 엄마도 너의 건강하고 예쁜 모습 그리면서 좋은 음식, 좋은 음악, 좋은 생각, 좋은 행동, 좋은 말시, 좋은 운동... 좋은 것만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지낼 터이니. 너도 좋은 세상을 그리면서 엄마 배속에서 편안히 지내렴.

봄 가뭄이 몇 달째 지속되고 있다. 비가 오려는지 날씨가 흐리구나. 잘 지내렴. (곡우 2001.4.20. 금)


<네 번째 장>

어제는 산부인과에 갔다.

우리 똘똘이 머리, 몸통, 손가락, 발가락, 심장을 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엄마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밤사이에는 우리 똘똘이 모습이 어찌나 이쁘게 그려지는지 잠까지 다 설쳤지 뭐니. 아빠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단다. 하기야 엄마도 엄마 뱃속에서 우리 똘똘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데 아빠는 오직 하겠니. 아빠도 엄마 진찰받을 때 함께 들어가면 더 실감 날 텐데. 다음에는 선생님께 아빠도 볼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아빠도 똘똘이 모습이 많이 보고 싶다는구나. 초음파 사진만으로는 잘 알아보기가 힘들거든.

밤사이 비가 살짝 내렸다. 봄비 머금은 새싹들이 더욱 씩씩하게 자라겠지. 우리 똘똘이도 엄마 양분 많이 많이 먹고 건강하게 자라렴.

엄마와 아기 만남 12주 6일째 (2001.4.29. 일)


2001년 4월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장
2001년 4월 첫아이 임신 후 쓰기 시작한 일기장 첫 페이지


일기는 2001년 4월부터 쓰기 시작하여 블로그에 2014~15년 기록한 것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일기장에 쓰고 있다. 24년 전 일기를 꺼내서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을 뿐 아니라 뭉클하기까지 하다. 아이를 위한 선물이었지만 자신을 위한 기록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도 자신이 뱃속에 있을 때, 기억하지 못하는 신생아, 영아기 때 등의 모습을 읽으면서 즐거워한다. "일기장이 보물이네."





#하나만 #라라크루

#딸아행복은여기에있단다_엄마에세이

#간호사무드셀라증후군처럼_간호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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