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으라는 것

상처 입은 자가 치유한다

by 아토

2013년 11월, 병원에서 학생실습을 하면서 작성한 글입니다.


이번 주부터 정신과 실습을 돈다. 핸드폰과 교과서를 모두 반납하고, 흰 가운 하나만 걸친 채 하루 종일 폐쇄 병동에 머무르며 환자분들과 시간을 보낸다.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고, 같이 카드게임을 하거나 로비 소파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이다. 어떤 분은 친구처럼 대화가 가능하지만, 둔마 상태에 빠져서 말을 섞기조차 어려운 분도 있다.


첫날이라 어색하게 두리번거리고만 있던 내게, 한 환자분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셨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로 시작해 점차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은 사별의 고통 속에서 따라 죽고 싶은 마음에 한참을 헤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상상도 못 했던 폐쇄병동에 와 있더라는 사연을 들려주셨다.


자연스레 나 역시 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평생을 키워주신 외할머니를 잃고 참혹함 속에서 헤매었던 그 시간을.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려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가끔씩 찬 바람이 그 구멍을 스치며, 그 구멍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채무임을 직감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순간마다 할머니가 슬퍼하실까 봐, 내게 바친 할머니의 평생을 위해서라도 나는 씩씩하게 살아나가야 했다. 그렇게 최악의 시간을 견딘 뒤에는, 더 이상 어떤 어려움도 두렵지 않다는 마음으로 버텨왔다.


사람들이 오가는 로비 한가운데서 환자분은 내 손을 잡고 한참 우셨다.

"기대도 안 했는데 이곳에서 선생님 같은 사람을 만나네요. 저보다 훨씬 어린데도 존경스럽습니다. 많이 위로가 되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뻤다. 이를 악물고 버텼던 나의 시간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씩씩하게 버텨온 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자원봉사자들이 말하듯, 상대에게 봉사하면서 실은 스스로를 돕는 느낌이라고. 환자분이 내게서 위로받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내가 치유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가운을 입었고, 당신은 환자복을 입었지만 사실 그것은 드러난 모습일 뿐, 그저 상처받은 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자니, 할머니 생각이 유난히 많이 난다. 비록 시골 한 구석에서 시험에 허덕이고 있는 학생일 뿐이지만, 흰 가운을 입고 병원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신다면 할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 생각에 가슴이 아리다.


누구에게나 각자가 가진 삶의 소명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음이 우리를 잡아끄는 것은, 실은 그 큰 에너지를 이용해서 삶 속에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라는 채근이 아닐까. 나 역시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으리라. 델포이 신전에는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신탁이 전해 내려온다. 내가 지금 겪는 이 모든 고난도 언젠가는 상처받은 자를 치유하는 길이 되리라 믿는다. 그러니 나는 살아가야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Ql59Rk-p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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