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남기고 간 흔적
※ 2023년 1월에 작성한 초안입니다.
어제 처음으로 정신분석 상담을 받았다. 나는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인연'들을 만날 때 머리를 끈 채 가슴으로 찾는 방식을 택하곤 한다. 의식의 얕은 수준에서 헤아리는 나의 사량분별이 영 마뜩잖기도 하고, 무의식이 나를 올바른 곳으로 인도해 준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런 나의 행태를 두고 충동적이고 무분별한 거 아니냐 하지만, 그 결과물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운 편이다. 경주 유학이나 병원 이직 역시 배병우 작가의 경주 삼릉 소나무 사진 덕에 하게 되었는데, 내 인생에 있어서 이 두 공간에 머무르게 된 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믿는다.
정신분석을 받아야겠다고 결심을 하자마자, 지도 어플을 켜고 무작정 정신분석이란 키워드로 검색을 하였다. 센터가 몇 군데 나왔는데 하나같이 가벼워 보여서 마음이 가지 않던 중, 아무런 광고도 소개도 없이 상호명만 하나 덩그러니 쓰여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아직도 운영하는 곳이 맞는 건가, 혹시 코로나로 인해 운영난을 겪다가 닫은 곳은 아닌지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구글에서 한참 검색하였다. 어딘지 모르게 정통의 느낌이 나는데, 여기 가면 나한테 딱 맞을 거 같은데... 오랜 검색 끝에 센터장님으로 추정되는 이름을 찾았지만 이분이 운영하는 곳이 맞긴 한 건가, 여전히 긴가민가. 아무리 찾아도 이렇다 할 정보가 나오지 않아서 일단 연락을 해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금방 답장이 왔고, 그렇게 무작정 예약을 했고, 나는 또 용감하게 찾아갔다.
센터 앞에서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두려움을 꿀꺽 삼키며 초인종을 눌렀다. 온화하면서 지적인 인상의 선생님이 나를 맞이하였다. 순간 여자 선생님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깊고 긴 내면의 여정을 막 시작하려는데, 이성이라는 이유로 소중한 동행 관계가 깨어질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 한가운데는 따스한 불빛의 스탠드와 포근한 카우치 소파가 놓여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잘 정돈된 선방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짧게 프로그램 안내만 받을 거라 생각해 엉거주춤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가, 끌리듯 끌려가듯 50분간 깊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상담 끝자락에 혹시 다음 주까지 해 올 숙제가 있냐고 여쭤보았고, 나에게 숙제를 원하냐고 물어보셨다. 숙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고, 나는 오히려 숙제를 주면 안 되는 사람 같다면서 뭘 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진지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정신분석을 해오신 전문가를 만났다며 여울에게 후기를 전하니 "허오오.. 뭔가 내공이 느껴지는 게, 처음 봤는데도 벌써 너를 간파하셨네!" 라면서 아주 즐거워하였다. 어깨에 힘을 주고 또 얼마나 큰 프로젝트를 하게 될 것인가! 잔뜩 긴장하며 갔는데, 심심하고 싱겁게 끝나서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훗날의 나는, 이게 나에게 가장 맞는 방식이었다고 회상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등불 선생님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상담이 끝나면서 선생님이 건네준 명함에는 작은 등불이 그려져 있었다. 명함을 거꾸로 돌려보면, 빛을 담은 성배 같아 보인다는 걸 혹시 아실까.
그리고 오늘 새벽에도 또 벌떡 일어나서 불면의 밤을 보냈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 아이 옆에서 같이 자면서, 새벽에 깨서 물을 찾는 아이 때문에 온몸의 감각신경이 곤두선 채로 자게 된다. 심지어 아이가 몸부림치다가 침대에서 떨어지려는 찰나, 눈을 번쩍 떠서 아이를 끌어안은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푹 자고 있어도 밤의 한가운데 한두 번씩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요즘은 깨기 직전의 꿈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도 많다.
간밤의 꿈속에서 나의 사랑하는 이모는 안방 방바닥에 누워있었다.
하얀 천 같은 이불을 코끝까지 덮고 두 눈만 나와 있는 채로.
이불을 걷으니 이모는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이모에게 말을 건넸다.
"나를 잘 키워줘서 고마워."
울음이 북받쳐서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울었고,
이모가 슬며시 웃으며 내 콧잔등을 만져주었다.
"콧잔등에 주름 생기면 안 이뻐."
"나를 키우면서 행복했어?"
이모의 대답을 들으려는 찰나,
총천연색의 마티스 풍의 그림이
도록처럼 좌우로 길게 펼쳐져 있는 화면이 떠올랐고,
그림은 계속 한쪽으로 끝없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이모는 화가였다. 디자인과를 나와서 명동에서 의상 디자인을 하다가 다시 홍대 대학원에 가서 서양 회화를 공부했고 행복했었다 들었다. 이모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연예인 오연수와 너무 닮아서 놀란 적이 있다.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이모는 아마도 여러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모는 결혼하면 일찍 죽는 사주를 가졌다 하여, 외할머니는 이모에게 들어오는 청혼을 계속 거절하셨단다. 나는 자상하고 다정하던 외할머니를 사랑했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통제적인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엄마의 바쁜 병원 생활과 외삼촌의 이혼으로 나는 초등학교 시절, 외가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모, 외삼촌의 딸이었던 언니와 함께 살았다. 부모님과 오빠는 주말에만 만나던 주말 가족이었다. 하얀색 무쏘를 몰던 이모는 나를 매일 아침 학교에 태워다 주었다. 내리는 길에 용돈으로 늘 100원을 받았고, 나는 문방구에 들러 그 100원으로 산수 시간에 쓸 스티커를 샀다. 100원짜리 스티커 10개들이 대형 세트를 사 오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웠지만, 이모에게 1000원씩이나 달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봐줄 만한 어른이 없었던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혼자 공부했다. 한 번은 산수 문제집을 풀다가 코피를 흘린 적이 있었고, 이모는 1학년이 무슨 공부냐며 그만하라고 했는데, 나는 그래도 해야 한다며 꾸역꾸역 끝까지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난다. 성격이 불같았던 외삼촌은 종종 언니를 크게 혼냈는데, 언니를 보며 관심을 받아 부럽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나도 그 관심을 좀 받아보겠다고 엄마가 준 용돈이 풍족하게 있었음에도 문방구에서 몇 번 물건을 훔친 적이 있었는데, 너무 은밀히 잘 훔쳤던지 가게 주인도 가족도 모르는 채로 나의 비행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미혼의 이모는 헌신적으로 날 키워주었다. 겨울방학이면 꼭 강원도에 있는 알프스 스키장으로 우리 셋을 데려가 주었다. 스키장에 가는 길에는 꼭 용바위식당에 들러 황탯국과 황태구이를 먹었다. 그때는 이런 구리구리한 고린내가 나는 음식을 왜 돈을 주고 사 먹나 매번 싫어했는데, 이제 나는 내 돈 주고 종종 황탯국을 사 먹는 어른이 되었다. 아이 하나만 데리고 외식해도 우리 부부는 입에 밥을 몰아넣는 둥 마는 둥 정신이 없는데, 나를 키우던 이모는 칠 년간 얼마나 고생이었을까 싶다. 중학생이 되어 부모님과 살기 위해 목동으로 온 이후 정착 과정의 부침이랄까, 가족들과 숱한 갈등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크게 체하거나 아팠고, 그 소식을 들은 이모는 직접 쑨 전복죽을 들고 훌쩍 날아와서 나를 돌봐주었다. "에그, 왜 또 싸웠어... 그러지 마. 너만 아파." 하면서.
그동안 나는 외할머니와 이모 그리고 엄마. 세 엄마의 몫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내 부채 의식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가족들이 저마다의 사정으로 괴로워하니까, 나만큼은 의젓하고 씩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십 대 초반, 예술적이던 재즈동아리 친구들과 한참 서로의 가정사를 털어놓으며 각자의 내면을 치유하는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다. 카페에서, 호프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보듬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꺼냈던 이야기가 있었다. 불은 라면 이야기. 아마도 오빠가 방학이라 언니, 오빠, 나 이렇게 셋이 외가에 모여 지내던 때였던 거 같다. 할머니는 우리 사랑스러운 손주들에게 라면을 끓여주셨고, 역시 할머니표 라면답게! 라면은 불어있었다. 나도 애를 키워보니, 왠지 꼬들꼬들한 면은 소화가 안 될 거 같아서 애한테 줄 라면은 30초씩 더 삶게 되니 할머니 마음이 이제 이해는 간다. 자기 욕구에 충실했던 언니와 오빠는 불은 라면은 안 먹겠다면서 그릇을 앞으로 밀어 치웠다. 순간 눈썹이 양쪽으로 처지며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할머니의 표정을 발견했고, "나는 불은 라면이 더 좋다."며 불은 라면을 내 앞으로 가져와서 씩씩하게 먹었다. 여덟 살 때의 일이었는데, 그 이후로 가족들은 정말 내가 불은 라면을 좋아하는 줄 알고 늘 푹 익혀서 줬다.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나도 꼬들거리는 면이 좋았어."라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선언했고, 그래도 십 년 간은 꼬들거리는 라면을 먹을 수 있었고, 이제는 다시 아이가 남겨 가락국수처럼 불어 터진 라면을 정신없이 입에 몰아넣으며 산다. 내 입으로 들어오는 라면의 양이 적을수록, 우리 편식쟁이 아이가 많이 먹었다는 뜻이니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정확한 진단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어서니, 2000년대 초반이었던 거 같다. 이모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뇌가 죽어가고, 몸이 굳어가는 병이란다. 전공의 수련 시절, 이모는 내가 수련받던 병원의 신경과로 진료를 다니셨다. 손을 떨다 못해 온몸을 떠는 이모를 나는 쳐다볼 수가 없었다. 진료 대기실에서 주변 사람들은 이모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불쾌감을 은밀하고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모와도, 그리고 주변과도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났다. 이후엔 주변 사람들이 이모를 빤히 바라보기만 해도, 병원에서 환자 처음 보냐며,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그렇게 뚫어져라 보냐며 의사 가운을 입은 채로 싸우기도 했었다. 나의 지도교수님은 엄마와 함께 이모를 부축하는 나를 보고 "할머니가 진료받으러 오셨구나."라고 하셨다. 나의 이모는 너무 늙고 쇠약해져 있었다.
이 십 년간의 투병 끝에 이모는 이제 거의 거동을 하지 못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자꾸 넘어져서 다치게 되고, 한동안은 거의 매달 골절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던 것 같다. 가족들은 다들 입 밖으로 언급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암묵적으로는 알고 있다. 이모와 같이 있을 시간이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평생을 침착하고 다정했던 이모가 가끔 어마어마한 분노를 터뜨리신단다. 그동안의 본인 인생이 너무 가엽다고. 그걸 옆에서 직접 겪어내는 가족들은 너무 아프고 비참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모가 지금이라도 배출해서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나의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육아하는 친구들과 소통하면서 종종 내 안의 결핍을 아이에게 대물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을 같이 나누곤 한다. 육아 친구들에게 아이는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아야지, 뭔가를 함으로써 인정받고 사랑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던 거 같다. 뭔가를 하는 것은 양육하는 어른들의 몫이다. 나의 아이가 나의 슬픔과 우울과 결핍을 어떻게 해줄 수도 없을뿐더러, 해줘서도 절대 안 된다고.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참 에너지가 쓰이고 심신이 힘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내 삶을 참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며칠 전 한꺼번에 잇달아 날아온 부고 소식으로 몸도 마음도 아파 슬픔에 잠겨 누워있는데, 아이가 옆에 같이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홍알홍알 옹알이 같은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내게 한마디 했다.
"수리는 엄마 너무 사랑해."
그 순간, 이것만으로도 이 아이를 키울 가치는 충분하다고 느꼈다. 엄마도 수리를 너무 사랑한다며 꽉 끌어안으니, 버둥버둥 헤엄치며 빠져나가는 것도 참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열이 39도로 펄펄 끓을 정도로 매우 아플 때만 내 배 위에 얌전히 누워 안겨있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비록 꿈속에서 대답을 듣지 못하고 깼지만, 이모가 무슨 말을 했을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힘들었을지언정, 행복했노라고.
※ 후일담을 덧붙여 글을 완성합니다.
23년 12월, 나의 사랑하던 이모는 결국 돌아가셨다. 임종을 지키러 달려가던 고속도로에서 불현듯 "이모. 그동안 고생 많으셨소. 부디 잘 가시오." 라는 생각이 스쳤고, 병원에 도착해 엄마에게 확인해 보니 바로 그때 즈음 이모는 돌아가셨다고 했다. 우리는 어쩌면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 아닐까. 그리고 장엄한 생애 속에서 과거의 이해가지 않던 순간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슬며시 아픈 미소가 지어지며 너무 자연스레 이해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성공 후의 공허함과 우울증 때문이었지만, 심층적으로는 서서히 죽어가는 이모와의 이별 준비를 위해 나는 23년 1월에 정신분석을 시작하였고, 24년 3월 즈음 마무리하였다.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의 한 가사처럼, 꽃이 지는 이유를 '머리로' 깨닫게 되며 면담은 마무리했다. 등불 선생님과 종결 시기를 딱히 정하지는 않고 "대략 이 년쯤 정신분석을 받으면 제 내면도 어느 정도 정리되겠죠?"라고 하였는데, 그 이후에 나는 약 일 년 동안 훈습을 통해 정신분석 과정에서 배운 가르침들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했다. 그러니까 이후 일 년까지 포함하면 정말 대략 이 년 정도 걸린 것이다. 지나고 보니 다 이해된다. 시작부터 종결까지의 모든 과정이.
정신분석 상담 마지막 회기 때, 등불 선생님과 나눴던 대화의 순간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등불 선생님에게 나는 분석가 인생 중 가장 인상적인 내담자였다고 한다. 치열하게 스스로를 파고드는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았고, 잘 성장해 줌에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고 하셨다. 이대로 보내는 게 아쉽지만, 앞으로도 잘해나갈 거 같아서 걱정이 들진 않는다고.
그리고 등불 선생님에게 나는 그동안 배운 것을 비로소 정리해서 전했다. 면담 중간에 한 번만 안아달라는 나의 요청에 쉽게 응하지 못한 머뭇거림, 나의 에세이를 읽음으로써 오히려 선입견이 생길까 봐 궁금증을 누르고 읽지 않겠다던 다짐, 정신분석이 끝나고 내가 돌아간 뒤에도 홀로 빈 방에 남아 면담 과정을 회상하며 기록하던 시간, 약속시간이 되기 전 미리 나와 면담 노트를 뒤적이며 과거를 회상하고 그걸 현재와 이으려던 그 묵묵한 성실함의 순간들. 믿음과 헌신의 순간들.
"등불 선생님. 이게 참.. 너무 진부한 말일수도 있고, 조금 느끼한 말일 수도 있겠는데요."
"네에. 느끼한 말일 수도 있는데요...?"
"선생님이 그동안 보여주신 모든 마음과 행동들은...
그건 사랑이었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신분석 과정 중 처음으로 서로를 끌어안았고, 약간의 눈물을 흘렸고, 앞길을 축복하며 사랑으로 헤어졌다.
며칠 무리를 한 탓인지 결국 탈수가 와서 수액을 맞고 누워있는 나에게 아이가 다가온다. 방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들이민다.
"엄마..."
"응, 엄마 안 아파. 괜찮아. 왜?"
"이거 엄마 쓰라고..."
"세상에. 지금 5분만? 아니면 오늘 하루종일?"
"응. 오늘 하루 종일 ^0^ "
아이가 몇 년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심지어 몸에서 한시라도 떨어지면 불안해서 안된다며 화장실뿐만 아니라 학교까지 갖고 다니던, 본인의 가장 아끼고도 아끼는 애착담요를 아주 뿌듯해하며 기꺼이 내어준다.
5분쯤 지나 다시 방문을 열고 빼꼼 들여다보기에, 역시 하루 종일 빌리는 건 무리였나 싶어 웃으려는 찰나,
"응. 이불 덮어주려고 다시 왔어." 라며 소중한 애착담요로 둥글게 엄마를 안아준다. 본인의 온 마음으로 아파하는 엄마를 포근하게 덮어준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었네.
https://youtu.be/1TWteQs6_Wc?si=LkW2N-dRrMw3L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