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마음이 남긴 것들을 바라보며

by 아토

늘 외부의 대상으로 향하던 마음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보고자, 비장하게(!) 결심한 지 어언 보름이 지났다. 그때부터 마음에 흔적을 남기는 감정이나 생각, 서사들을 천천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외로운 걸 보니 요새 사람을 못 만났어." 대신 "외로운 마음이 들지만, 내면에서 이 감정을 한번 수습해 봐야겠어."라는 방식으로 인식 구조가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가슴에 텅 빈 감정이 느껴질 때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여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얼마나 자주 외로움과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걸 이제까지 사람과 일로 채우고 살아왔던 것이다. 조금의 빈 시간이라도 생기면 그 공허가 스스로를 잠식시킬까 두려워, 성실한 모범생의 컬러링북처럼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빼곡하게 채색하며 지내왔다.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나의 행동을 억지로 제한하거나 억누르지는 않으려 한다. 대신 나 자신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그 순간에 아주 조금씩이라도 머물러 보는 연습을 한다. 위빠사나와 선가의 스승들이 셀 수 없이 가르치던 '그저 바라보면 사라진다'는 원리를 이제는 몸으로 체득해보고 싶다. 그래서 딱히 더 새로운 조작을 가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바라보는 시간이 쌓이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내 안의 패턴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내게 얼마나 불안의 에너지가 많았는지 새삼 깨달았다. '하고 싶다'는 '해야 한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로 문장이 서사를 덧입혀갔다. 어느새 하고 싶었던 마음은 사라지고 의무와 필연의 마음만이 남아있었다. 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던 불안한 마음이 수많은 성취와 만남의 시간을 낳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 삶을 대상으로 작은 실험을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무거운 불안 대신에 산뜻한 평온으로, 무언가를 채우는 대신 비우는 방식으로 삶을 그대로 두어보기로 한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려 하거나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어딘지 숨이 턱 막히거나 몸에서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들면, 그대로 멈추었고 산뜻하게 거절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바이오융합 연구원 제안도, 연구 심사위원 제안도, 세포처리실장 제안도 거절했다. (병원 조직에서는 가만히 있다 보면 순식간에 1인 9역을 하게 된다. 눈 뜨고 코가 베이다 못해 목까지 베일 지경이다.)


반면에 의과대학 학생 강의는 어딘지 모르게 설레는 마음이 들어서 덥석 받아들였고, 전공의 교육도 자진해서 맡았다. 교육이 가장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었던 역할이었는데, 삶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요즘은 전공의와 전문의시험 기출문제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서 한 문제씩 풀어나가고 있다. 예전에는 혹시라도 모르는 내용에 대해서 질문받을까 봐, 그 불안감에 교육하는 자체가 부담되고 두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요새는 무슨 배짱인지 "나도 전문의 시험 본 지 꽤 오래되어서 기억 안 날 수도 있지만, 우리 둘이 머리 합치면 일 인분은 되지 않겠냐."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같이 공부를 해나가고 있다. 임상 현장에서 체득한 지식과 감각이 내 안에 제법 남아있었고, '나는 모른다'라고 선언하고 나니 전공의가 미리 공부해 온 이론과 최신 지견을 듣는 뜻밖의 혜택도 쏠쏠하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내 안의 무게중심이 달라졌다. 요즘 나는 텅 빈 공간에 스스로를 모르는 상태로 놓아두고 있다. 과도했던 감정선들이 옅어졌고, 하루하루 별다른 일은 없는데 이상하게 충만한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이토록 텅 빈 공간이 허무라기보단 여백과 여유의 공간, 숨 쉴 틈으로 느껴진다. 이 해방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감각을 열어서인지 아니면 불안의 에너지를 내려놓아서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머릿속으로 만들어내던 서사를 내려놓으니, 내 글답지 않게 글이 좀 맹숭맹숭하다. 항상 현상을 관찰하고 서사를 부여해서 하나의 주제의식을 도출해 내던 이 마음 작용 자체를 해체 중이니, 한동안은 결론 없는 기록들을 쓸 수밖에 없겠다. 지금의 이 상태를, 나의 솔직한 수행 기록으로 적어둔다.



제주, 닭머르해변

https://youtu.be/4iMD4dh-vEs?si=Rk0aHOETtMw1qf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