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직업의 귀천이 사라진 세계에서 던진 질문

by 아토

의과대학에 다니던 시절, 시험이 끝나면 주말마다 혼자 버스와 기차를 타고 이곳저곳 다니곤 했었다. 순천 송광사를 향하던 길이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주암호를 끼고도는 버스 안에서 문득 생각했다. 만약 이 세상에 직업의 귀천이 없고, 벌어들이는 월수입과 정년도 모든 직업에서 똑같다면 나는 과연 어떤 직업을 선택할까. 분명 의사라는 직업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큰 만족을 줄 수 있는 좋은 직업이었지만, 정말 모든 것이 똑같은 제로의 조건에서도 나는 과연 이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그래서 아주 정직한 마음자리에서 순서대로 세 개의 직업을 꼽아보았다.


휴양지 리조트 상주 의사. 코미디 작가. 여행 작가.

다행히 의사라는 직업이 나의 순위권 안에, 그것도 형태는 좀 독특할지언정 첫 번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에 내심 안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십 년 가까이 잊고 있었던 저 질문들을 최근에 다시 떠올려보게 되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십 년이 지난 지금, 저 셋을 어찌어찌 버무려 놓은 삶을 살고 있다.




그 첫 번째, 리조트 상주 의사의 꿈.

지금 비록 따뜻한 남국의 리조트에 상주하며 따사로운 햇살 속을 유유자적 걷고 있지는 않지만, 루푸스 진단 덕분에 참 많은 업무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려놓게 되었고, 맑음도 흐림도 그 날씨 그대로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 사계절이 아주 완연한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야자수가 늘어선 휴양지에서의 삶과는 다르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화창한 느낌이다. 십 년 후에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루푸스 환자의 몸에 좋은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다. 혼자 가슴속에 떠올렸다가 구체적으로 계획해 보곤 하는데, 어쩌면 정말 그곳에 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 코미디 작가의 꿈.

송광사를 가던 길 위에서 코미디 작가의 꿈을 떠올리던 때에는 좀 더 어둡고 아픈 글을 쓰던 시기였다. 성적 줄 세우기가 일상이던 의과대학 안에서 고독한 시간을 버티기 위한 생명줄 같은 글쓰기였기에 더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하고, 때론 폭소가 터지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꿨다. 요즘 종종 내 브런치 글을 읽은 지인들로부터 감상평을 전해 받곤 한다. 아직 같이 웃었다기보다는 울었다는 후기를 전해 듣는 경우가 많지만, 내 마음 길이 밝아지고 좀 더 부드럽게 닦이게 되면 사람들 가슴속에 어떤 따스한 희망을 던져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꿈꾼다.


세 번째, 여행 작가의 꿈.

이 꿈은 벌써 절반가량 이루었다. 매년 해외 학회에 가서 발표를 해야 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덕분에,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해외로 떠난다. 심지어 학회가 아니면 가보기 힘든 도시들, 스웨덴의 예테보리, 호주의 태즈매니아 같은 도시들을 가게 된다. 올해에도 캐나다의 해밀턴과 이탈리아의 모노폴리를 갈 예정이다.


여행이란 행위 자체가 내게 다양한 생각의 기회를 준다. 하루하루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서울에서의 일상을 살아가자는 뜻을 품고 있지만, 그래도 낯선 도시에 덩그러니 떨어지는 경험만큼 내게 강렬한 자극은 없다.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허술했는지를 돌아볼 기회를 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인류 보편의 감정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망사 스타킹과 비키니를 입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유럽 아저씨를 아랑곳하지 않는 시선 속에서 정신적 해방감을 느끼고, 장거리 비행 중에 탈진한 나를 보살펴주던 라틴계 아주머니의 미소를 보며 친절함은 만국 공통어였구나 새삼 느낀다.




이 질문을 나만 갖고 있기엔 아까웠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는 중년의 교수님들, 혹은 회사 임원들에게 종종 저 질문을 던지곤 했다. 다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흠칫 놀랐다가, 이내 고민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여러 나라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통역사를 말하는 분도 있었고, 현재 전공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역사학자를 떠올리는 분도 있었다. 잊고 있었던 유년기 시절의 꿈과 희망, 건강한 욕망을 일깨우는 이 질문을 나는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에게도 던지며 살아가고자 한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여름날, 하늘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님께도,

잠시 마음을 고르고 조용히 묻고 싶다.


만약 이 세상에 직업의 귀천이 없고
모든 조건이 같다면,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하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