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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지 Apr 24. 2022

[사진과 문장] 여자 없는 남자들

하루키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이 경우 (잘 아시다시피) 그녀를 데려가는 것은 간교함에 도가 튼 선원들이다. 그들은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여자들을 꼬여내, 마르세유인지 상아해안인지 하는 곳으로 잽싸게 데려간다. 그런 때 우리가 손쓸 도리는 거의 없다. 혹 그녀들은 선원들과 상관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모른다. 그런 때도 우리가 손쓸 도리는 거의 없다. 선원들조차도 손쓸 도리가 없다.


어쨌거나 당신은 그렇게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다. 그리고 한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베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 갖췄다 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과 함께 색은 다소 바랠지 모르지만 얼룩은 아마 당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곳에, 어디까지나 얼룩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얼룩의 자격을 지녔고 때로는 얼룩으로서 공적인 발언권까지 지닐 것이다. 당신은 느리게 색이 바래가는 그 얼룩과 함께, 그 다의적인 윤곽과 함께 생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중략)


설령 그후에 다른 여자와 맺어진다 해도,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멋진 여자라고 해도(아니 멋진 여자일수록 더더욱), 당신은 그 순간부터 이미 그녀들을 잃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선원들의 의미심장한 그림자가, 그들이 입에 올리는 외국어의 울림이 당신을 불안하게 만든다. 전세계 이국적인 항구의 이름들이 당신을 겁에 질리게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는 게 어떤 일인지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당신은 연한 색 페르시아 카펫이고, 고독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보르도 와인 얼룩이다. 그렇게 고독은 프랑스에서 실려오고, 상처의 통증은 중동에서 들어온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게 세계란 광대하고 통절한 혼합이며, 그건 그대로 고스란히 달의 뒷면이다.(중략)


엠이 지금 천국--혹은 그에 비견되는 장소--에서 <A Summer Place>를 듣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칸막이 없는, 넓고 넓은 음악에 부드럽게 감싸여 있으면 좋겠다.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건 흘러나오지 않으면 좋겠다(하느님이 아마 그렇게까지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기대한다). 그리고 그녀가 <A Summer Place>의 바이올린 피치카토를 들으며 이따금 나를 떠올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많이는 바라지 않는다. 설령 나는 접어두더라도, 엠이 그곳에서 영겁불후의 엘리베이터 음악과 함께 행복하게, 평안하게 지내기를 기도한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일원으로서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한다.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잆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현재로서는. 아마도.


"여자 없는 남자들" pp.330-337.


* 읽고 난 소감: 세상에는 아마도 두 부류의 남자들이 있는 듯 하다.


1) 늘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요, 라고 외치고 있는 남자, 2) 정말로 한 여자가 오래 머무를 수 없었던, 없는, 그러한 깊은 영혼의 교통이 힘든, 늘 여자의 앞면만 또는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는 남자. 아, 제 3)의 남자군도 있겠다: 지극히 복 받은 집단. (앞서 두 가지에 해당되지 않으면 무조건 복 받은 경우: 여자를 ‘여자’라고 특별히 또는 어렵게 또는 가볍게 여기지 않는, 동질적 교집합이 잘 개발된 인간집단..)


(저작권 있는 사진입니다. 허가없는 무단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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