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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씨일기 Jan 03. 2024

240103: 죽은 다이어리의 무덤, 그 위엔

매일 쓰는 짧은 글



문구를 사랑하는 마음과 작심삼일의 의지박약이 만나면 이뤄지는 일. 그건 바로 매년 새 다이어리를 사놓고 한 달을 채 못쓰고 방치해두기이다. 누군가에게 취미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다이어리 쓰기요'가 아니라 '다이어리 학살이요',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그것도 통장 학살을 겸한. 그렇게 쓴 듯, 안 쓴듯한 다이어리가 벌써 십 수권이 쌓여 내 방 한편에 고이 쌓여가고 있다.




내다 버리기엔 애매하지만 그래도 쓴 부분이 있어서 난감하고, 그렇다고 계속 두기에는 다시는 들여다보지도 않을 애매한 사이가 되어버린 이 다이어리들. 하나 둘 뉘어서 쌓다 보니 꽤나 가파르게 올라가는 모양새가 나의 비참한 끈기력을 가시화한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럽다. 그런데 올해 10월, 나름 감명 깊게 읽었던 김익한 교수님의 <거인의 노트>를 시발점으로 다시 교보문고에 달려가 할인하는 저가형 다이어리를 한 친구 다시 데려왔다. 물론 처음에는 몰스킨이나 로이텀 같은 나름 다이어리계의 명품 진열대 앞에서 어슬렁거렸지만, 내 방 안의 슬픈 다이어리의 무덤을 떠올리고서는 한 발짝 물러나 반값 할인하는 양장형 그리드 노트를 한 권 구매했다. 다이어리를 꾸준히 쓰는 버릇도 없는 데다가 어설픈 완벽주의자인 내가 처음부터 몸값 비싼 친구들을 데려다 글을 쓰면 분명 다이어리에 글을 쓰는 게 너무나 조심스러워져 분명 또 쓰다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게 옳은 선택이었다.



SNS에나 유튜브나 여러 다양한 플랫폼에서 이미 멋지게 다이어리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넘쳐흘렀다. 이것조차 재능이 필요한 영역인지, 조금은 벅찬 마음을 안고 사람들의 다이어리 세팅을 참고해서 불렛저널이란 것을 시도해 보았다. 다이어리를 쓰는 것에 능숙해지면 뭔가 삶이 바뀔 것처럼 굉장히 동기부여적인 말들을 말하고들 있지만 아직은 그런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매일 흘러가는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놓는 기분이 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 해를 돌아보고 나니, 작년에 했던 가장 멋진 일이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산다고 산 것 같은데 막상 돌이켜보면 떠올릴 만한 일들이 없어 그저 또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했나 하는 마음이 들 때면 다이어리를 펼친다. 그러면 그 안에는 하루하루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 내가 있어 내가 나에게 가하는 셀프 자아채직질을 조금은 줄일 수 있었다.






다이어리를 쓸 때면 매번 실수 없이 완벽하게, 깔끔하게 쓰고 싶다는 강박이 들어 조금만 실수를 하거나 글씨를 잘못 쓸 때면 마음이 팍 식어 그대로 멈춰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몇 번 크게 줄을 잘못 긋고 화이트 범벅으로 다이어리를 휘젓고 나니 완벽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잘 써야겠다는 강박이 줄었고, 이미 완벽에서 멀어진 김에 편히 이것저것 시도하며 내가 하고 싶은 다양한 기록들을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싼값에 산 거, 적당히 시행착오를 겪는 연습용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써나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다이어리 한 권을 다 쓰다니 이게 정말 내 생애 가능한 일이었던가! 크지 않은 노트여서 10월에서 12월까지의 짧은 3개월 동안의 일만 매일 적어도 금세 다 써버렸지만, 그래도 성공은 성공인지라 나름 너무 뿌듯하다. 이제는 이 다 쓴 3개월짜리 다이어리를 '그' 다이어리의 무덤 정상에 올려놓고자 한다. 무수한 실패들 아래에서 쌓아 올린 단 하나의 작지만 확실한 성공의 징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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