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때문에 3년 동안 지방에서 일한 적이 있다.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쫓기듯 살던 서울보다는 훨씬 여유로웠다. 정시에 퇴근했고, 집에 들어가면 저녁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까지 가는 교통이 여의치 않아 작은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출근길은 내리막이라 상쾌했지만, 퇴근길은 오르막이었다. 아파트 앞 마지막 언덕은 매우 가팔라서 매번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올라갔다.
한여름 그날도 언덕을 넘었다. 가까스로 집 앞에 다다랐을 때는 셔츠가 온통 땀으로 등에 들러붙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밀려왔다.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부엌에서는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고, 아들은 엄마 곁에 착 달라붙어 종알대고 있었다.
아내는 평소와는 다른 웃음을 띤 채 무언가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알약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알약들이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뭐냐고 묻자 부엌 한쪽에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 왔다. 건강식품이었다. 반짝이는 포장지에는 한자와 영어가 요란하게 뒤엉켜 있었고, 그 옆에는 방문 판매원이 두고 간 것이 분명한 안내 책자들이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사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월급은 많지 않았고, 집 대출금을 갚아 나가느라 매달 통장을 들여다보며 한숨 쉬던 팍팍한 살림이었다. 그런데 수십만 원짜리 수상쩍은 건강식품을 덜컥 사버린 것이다. 그것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방문 판매원에게서.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을 잃은 나를 보며, 아내는 멋쩍은 듯 웃음을 거두고 조용히 말끝을 흐렸다.
“당신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아내는 평소 충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이과계 수재였다. 그토록 이성적이고 냉철한 머리를 가진 여자가, 오직 축 처진 남편의 어깨 하나 때문에 이 수상한 알약들에 선뜻 지갑을 연 것이다.
Besotted.
참 묘한 단어다. ‘be(되다)’와 ‘sot(바보)’가 합쳐진 말이다. 흔히 ‘홀딱 사랑에 빠진, 넋이 나간, 헤어나지 못하는’ 정도로 옮겨지지만, 그런 번역만으로는 어딘가 성이 차지 않는다. 이 단어의 심술궂고도 사랑스러운 핵심은 그 안에 들어 있는 sot, 곧 바보, 주정뱅이, 얼간이 같은 기운에 있다. 트로이 전쟁을 다룬 셰익스피어의 희곡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에서 트로이의 왕은 헬레네에게 홀딱 빠진 아들 파리스를 두고 이렇게 핀잔을 준다. “Paris, you speak like one besotted on your sweet delights.” 한마디로, 아들이 사랑에 취해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트로이 전쟁 같은 거창한 비극도 결국 사랑에 빠진 바보 하나가 불씨를 당긴 셈이니, 인류는 오래전부터 이 단어의 뜻을 아주 비싼 값을 치르고 배워 온 셈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을 이토록 얄밉고도 정확하게 꿰뚫은 단어가 또 있을까? 이런 바보들을 찾기 위해 멀리 고대 그리스까지 갈 것도 없다. 여자화장실 앞에서 분홍색 핸드백을 들고 안절부절하고 있는 청년들, 업사이드룰도 모르면서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유니폼을 입고, 축구선수들의 이름을 밤새 외우는 바보들은 어떠한가? 남편에게 삼계탕을 해주겠다고 생닭을 손질하다 울음을 터뜨리는 신부들, 번화가 길 한복판에서 여자친구의 ‘인스타그램 샷’을 찍어주겠다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기괴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남자들 모두 사랑에 빠진 바보들이다. 생각해 보면 사랑은 사람을 영리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꾸 어리석게 만든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짓을 하게 하고, 따져 보면 손해인 선택을 하게 하고, 남들이 보면 웃을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만든다. 그런데 사랑의 진심은 대개 바로 그 어리석음 속에 숨어 있다. 이성과 합리 따위는 기꺼이 내던져 버린 그 순전한 바보 같음이야말로 사랑에 빠진 증거다.
그날, 아내가 내민 수상한 알약을 나는 군말 없이 삼켰다. 무언가 잘못한 건가 싶어 울상을 짓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알약의 효과였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나는 기운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영양제를 다 먹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알약을 내밀던 아내의 얼굴은 또렷이 기억한다.
세상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바보의 다정한 얼굴.
Besotted
/bɪˈsɑːtɪd/
besot의 과거분사, 사람이나 어떤 것에 강하게 매혹되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 제정신이 아닌, 홀딱 반한, 분별력을 잃은, 술에 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