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렸다. 끄고 다시 잤다.
다시 울렸다. 또 끄고 잤다.
세 번째 알람이 울렸다.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더라.
월요일인가, 금요일인가.
하지만 금요일이라 한들 별 차이는 없었다.
금요일이 끝나면 다시 월요일이 오고 월요일이 지나면 또 금요일이 오고.
출근, 퇴근, 다시 출근. 반복.
이 끝없는 패턴 속에서 나는 허우적대고 있었다.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봤다.
거울 속 남자가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야, 진짜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냐?"
나는 거울을 향해 되물었다. "그러게, 언제까지 해야 하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출근길, 나는 무채색 인파 속에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 일사불란하게 끌려가는 인형들 같았다.
누군가는 핸드폰을 쥔 채 멍하니 뉴스를 읽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문득 드는 생각.
여기에 시지프스가 있다고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군.
사실 신들이 시지프스를 벌한 것은 대놓고 잔인하게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한 형벌을 넘어 보다 치밀하고 교묘한 벌을 설계했다.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게 만든다.
끝없는 반복.
희망과 절망의 무한 루프.
이쯤 되면 신들도 꽤나 지루했을 텐데.
어쩌면 그들은 내 인생도 관찰하고 있을지 몰랐다.
"오, 이 인간은 또 바위를 밀기 시작하는군."
"하지만 30분 뒤에 보고서 피드백이 들어올 거야. 그럼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겠지."
"이 인간은 언제쯤 체념할까? 혹은, 언제쯤 이걸 받아들이고 웃게 될까?"
사무실에 도착하자 내 자리 위에 바위가 놓여 있었다.
메일함에는 새로운 업무 요청이 가득했고 책상 위에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컴퓨터를 켰다.
그래, 이걸 밀어 올리면 되는 거야.
밀고 밀고 또 밀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또 바위는 원점으로 돌아와 있을 것이다.
새 업무, 새 피드백, 새 프로젝트. 반복, 반복, 반복.
사실 이런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퇴사.
퇴사하면 바위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막연히 그런 상상을 해본다.
언젠가 나는 이 회사를 나가서 바다 근처에서 조그만 카페를 열고 조용히 살아가겠지.
아침엔 커피를 내리고 낮엔 책을 읽고 저녁엔 맥주 한 잔을 하면서 노을을 바라보는 거다.
하지만 카페를 차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출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월세와 임대료라는 새로운 바위가 생긴다.
커피 원두 값이 오르면 바위는 더 무거워질 것이다.
하루 종일 커피를 내려도 손님이 오지 않으면 그 바위는 혼자서도 나를 짓누를 것이다.
결국 내가 바위를 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바위의 형태가 바뀐 것뿐이다.
회사에서의 노동을 버리면 생계를 위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걸 피하면 또 다른 노동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삶?
그것도 결국은 또 다른 종류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바위를 밀면서 절망할 것인가 아니면 바위를 밀면서 피식 웃을 것인가.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다가 어느 순간 체념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바위를 올리면서 무언가 깨닫지 않았을까?
"이게 나의 삶이구나. 그렇다면, 이 바위를 나만의 방식으로 밀어보자."
그는 바위에 이름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바위를 밀기 시작할 때 "자, 오늘도 올라가보자, 바위야." 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혹은 바위 위에 무늬를 새기거나 밀면서 노래를 흥얼거렸을 수도 있다.
결국 그는 바위를 저주하는 대신 바위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나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위를 버릴 수 없다면 적어도 내 식대로 밀어보자.
퇴근길, 버스 창문에 기대어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피식하고 웃으며 바위를 밀어보자."
어차피 내일도 바위는 굴러떨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