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그림자

신구약중간사 9부

by 참지않긔


요새라는 말은 언제나 차가운 벽돌과 두터운 침묵을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

아크라 요새는 그중에서도 유독 무거운 침묵을 간직한 곳이었다.

하나냐는 가파른 언덕 너머로 그 성벽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는 전우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바람은 칼끝처럼 싸늘했고 예루살렘의 먼지들은 유대 땅의 모든 기도를 잊은 듯 흩날렸다.


“굶기면, 그들 스스로 나올 겁니다. 요새는 결국 배고픔 앞에 무너지니까요.”


마카베오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단호했다.

그의 눈은 언제나 그랬듯 멀리 있었다.

아크라의 두터운 성벽 너머, 그 벽 안에 몸을 숨긴 자들은 단지 셀레우코스의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칼을 들었던 유대인들, 신전을 제우스에게 내맡긴 자들, 아버지를 고문에 내맡긴 그 자들의 아들들.

하나냐는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았고 그러다 말았다.

전쟁이란 그런 질문을 사치로 만드는 법이었다.


요새를 포위한 지도 몇 주째.

유대 반란군은 수차례에 걸쳐 공성 장비를 동원했지만 요새 안쪽의 방어는 예상보다 끈질겼다.

고립된 그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마치 요새 그 자체가 믿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면 공포, 혹은 이곳에서 항복하는 순간 그들에게 내려질 단죄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 지평선에서 연기와 함께 먼지가 일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리시아스다."


3만 명의 병력.

그리고 전투 코끼리 서른 마리.

하나냐는 처음엔 그것이 허풍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그 소식 앞에서 침묵했고 그 침묵은 거짓보다 무거웠다.

결국 반란군은 아크라 포위를 풀고 예루살렘 남쪽 벳제카리아로 후퇴했다.


그날 밤, 진영엔 불이 켜졌고 병사들은 말없이 무기를 닦았다.

하나냐는 처음으로 진정한 패배를 예감하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두려움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보다 무서운 건 곁에 있던 이들의 침묵이었다.

마카베오조차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엘르아살은 조용히 검을 갈며 기도 없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이튿날 새벽, 대지는 중압감에 떨고 있었다.

하나냐는 참호 너머를 바라보다 숨을 삼켰다.

언덕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코끼리들은 산과 같았다.

병사들은 그 앞에서 무릎이 풀려 주저앉았다.

짐승들의 울음이 하늘을 찢었고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마카베오는 산지 전술을 선택했다.

기습으로 측면을 노리는 전형적인 방식.

그러나 리시아스는 달랐다.

그는 팔랑크스 양측에 별도의 창병대를 배치했고 전열은 빈틈이 없었다.

병사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싸웠다.

검이 부딪히고 창끝이 살을 찔렀다.

피비린내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때, 코끼리들이 본격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지진에 가까웠다.

말들이 날뛰었고 병사들은 전열을 잃었다.

하나냐는 그 거대한 생명체들이 달려드는 모습 앞에서 두 다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엘르아살이 달렸다.


“엘르아살!” 하나냐가 외쳤다.

그러나 목소리는 전장의 함성에 묻혀 사라졌다.


엘르아살은 자신의 키의 두 배쯤 되는 코끼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창을 든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나아가 그는 짐승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나냐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를 붙잡았다.


엘르아살은 짐승의 배 밑에 도달하자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짧은 기도처럼 외쳤다.

"하나님, 이 칼을 받으소서."


검이 내리꽂혔다.

코끼리가 울부짖었다.

피가 터졌고 짐승은 괴성 속에서 무너졌다.


그리고 그 아래—엘르아살.


하나냐는 그대로 무너졌다.

눈앞이 붉게 물들었고 숨이 막혔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쳤다.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는 들리지 않았다.

병사들의 외침도, 마카베오의 명령도, 코끼리들의 짐승 같은 울음소리도.


오직 엘르아살의 얼굴만이 눈앞에 맴돌았다.

조용한 미소, 검을 손질하던 손, 형을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의 그 눈동자.


그는 산이었다.

하나냐는 생각했다.

우리가 기댈 수 있었던 가장 단단한 산.


마카베오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 말조차 메마르게 들렸다.

엘르아살의 시신은 부서진 방패 위에 올려져 수레에 실렸다.

하나냐는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넌 산이었고, 검이었고, 형제였다. 그리고 이제, 우린 너 없는 산을 올라야 해.”


그날 밤, 그는 별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멀었고 침묵은 가까웠다.

전장의 먼지가 아직도 폐 속에서 씻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밑에 하나의 생명이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모두를 살리고 홀로 사라진 그 이름 없는 기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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