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점점 줄었다.
말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그건 조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나를 향한 말들이 가장 먼저 끊겼고 그 다음엔 나를 둘러싼 외부의 언어들이 뒤따라 끊겼다.
모두가 웃을 때 나는 웃지 않았고 누군가 화냈을 때 나는 가만히 있었다.
표정의 결정을 미루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건 더 이상 상황을 감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감지한 것을 받아들일 힘이 남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 말이라는 것이 말해지는 게 아니라 쌓이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고,
누군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조차 의미가 없어졌다.
말은 행동의 일부였고 나는 더 이상 어떤 행동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게 그 시절의 내 상태였다.
병명은 없었다.
증상은 분명했지만 언어로 고백하지 못하는 상태에선 진단도 의미 없었다.
어쩌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소화하던 내 안의 감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람을 사랑했으나 사랑은 늘 번아웃의 다른 이름이었다.
좋아하는 만큼 몰두했고 그만큼 무너졌다.
관계란 결국 자기 안에 누군가를 들이는 일이니까.
나는 들였고 너무 많이 들였고 결국 그 안이 나보다 타인으로 가득 찼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는 그걸 오해했다.
침묵은 반항으로 읽혔고 무표정은 무례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누구도, 단 한 사람도 묻지 않았다.
“혹시 힘들어?”라고.
아니, 아니었다.
사실은 수없이 들었다.
문제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그저 그 안에서 버티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해진 역할, 정해진 관계, 정해진 반응 속에서
나는 예측 가능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질서라고 믿었고 그 질서 안에 남는 것이 나라고 생각했다.
견디는 것과 살아 있는 건 다르다.
나는 처음엔 버텼다.
어느 지점부터는 그게 버티는 건지 아니면 숨을 참는 건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감정은 마르고 눈물은 빠르게 증발했다.
밤은 길었지만 그 시간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눈을 감았고 그렇게 겨우 하루가 넘어갔다.
어느 날, 정말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카페를 나설 수 없었고 전화기에 뜬 이름을 눌러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다기보단 모든 것이 무게를 가졌고 그 무게를 들어 올릴 손이 더는 내게 없었다.
그때서야 조금 살아진 것 같았다.
모든 걸 잃고 나서야 조금은 가벼워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회복은 늘 사건 뒤에 온다.
그리고 생각보다 아주 조용하게 도착한다.
누군가 건넨 “잘 지내?”라는 말.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도착했을 때 나는 울 수 없었고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도 남았다.
한참을, 아주 한참을 머물렀다.
나는 누군가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좋아졌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
말을 듣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옆자리를 채워주는 일.
그 일의 무게가 얼마나 귀한지를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하루에 한 번, 물을 마시는 것처럼 누군가의 작은 시선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다는 게 조금은 덜 버거워졌다.
회복은 더디었고 불완전했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안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온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런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지금의 내 삶에서 가장 무겁고 가장 정확한 방향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