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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Nov 24. 2024

정체는 알지 못해도 마음만은 확실히 알 수 있어

봄에 선물 받았던 중국차 소포장 패키지

봄이 오면 차를 선물해 주는 친구가 있다. 중국 무역 관련 일을 하는 친구인데 중국에선 꽌시꽌시를 위해, 혹은 의례히 차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차를 엄청 즐겨마시진 않는 친구네는 이렇게 선물 받는 차들이 아깝다고 차 마시는 사람에게 나눠주는 게 좋다고 한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업관계로 알고 지내는 사이다 보니 당연히 하급을 선물하고 그러진 않을 것이고 뭐 엄청난 사치품은 아니더라도 늘 상급의 차가 이러한 지인 루트로 입수되는 봄이다.

선물패키지

올해도 이렇게 차 선물을 받았다. 소포장 몇 개 안 되는 것 같지만 이 이후로도 이만큼 더 주어서 적지 않은 양이었다. 처음엔 잘 몰라서 엄청 중국 웹페이지를 뒤적거렸는데 이렇게 주는 차들 대부분이 선물용으로 집에서 재포장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정확히 어디의 어떤 차인지는 알기가 어렵다. 공짜로 좋은 차를 얻지만 단점은 내년에도 같은 차를 얻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올해 어떤 봉지에 들어있는 차가 맛있었다고 넌지시 찔러보라 친구에게 제보하는 정도이다. 아무튼 오늘은 중국에서 건너 건너 나에게 온 이름 모를 차들을 연달아 쭉 마셔보는 시간이다.

올해의 득점왕 정산소종

첫 번째 차는 정산소종이다. 달고 육즙이 많은 스타일로 올해 정산소종 왜 이렇게 맛있냐고. 올해 다른 곳에서도 이래저래 많은 차들을 마셔봤는데 정산소종이 전반적으로 폼이 좋은 한 해였던 것 같다. 시럽을 탄 듯 달달하면서 차 본연의 맛이 뭐랄까 쥬시한 차품이 많았다.

정산소종

다만 아쉬운 건 내포성이 좋은 경우는 거의 보질 못했다. 정산소종 특징인지 3-4번 마시면 거의 맹탕이라 금방금방 먹고 치울 수 있었다.

금준미 호소차

다음은 금준미. 근데 포장이 금준미일 뿐 진짜 금준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건엽이 금빛이 아닙니다? 준덕선생과 정산당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그 오리지널 금준미는 아닌 것 같다. 맛은 정산소종 비슷해서 아마도 다른 회사에서 정산소종의 한 종류로 만들어서 넣은 금준미가 아닌지 모르겠다. 받는 입장에선 맛만 좋으면 그만인데 미묘하게 좀 싱거운 부분이 있어서 그것도 살짝.

금준..미

아까 이야기한 대로 선물에 장난칠 일은 없을 것 같고 그 ‘금준미’가 아닌 것 같다는 걸 빼면 뭐 나쁘지 않은 차였으니까 그럭저럭 괜찮은 정산소종이라 치고 마셨다.

대홍포

다음은 대홍포. 이거 말고도 암차를 단지로 하나를 또 안겨줘서 올해 암차는 정말 심심할 때 막 마시는 밥차 느낌으로 마셨는데 단지에 들어있던 건 선물로 주기엔 정말 품질을 겨우 맞춘 느낌이었고 포유가 엄청 강하게 되어 있는데 찻잎의 형태가 복원이 되질 않아서 전달해 준 친구도 대충 먹으라고 할 정도. 이쪽이 그래도 진짜 대홍포 느낌이었다.

대홍포

암차 특유의 들큰한 누룽지향이 처음부터 폴폴 난다. 올해 암차는 돌아다니며 마셔본 것들도 딱히 품이 좋은 경우는 잘 보지 못했던 거 같은데 투자금액이 부족했던 걸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정산소종에 비하면 살짝 떨어지는 품이었다. 올해 대홍포가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걸 감안하면 편하게 즐기기엔 더없이 좋은 정도였다. 3번까지 진함이 유지되고 내포성이 끝장나는 느낌은 역시 아니었다. 정산소종과 함께 가장 부담 없이 즐겼던 차 같다.

철관음

다음은 철관음인데 올해 유독 여기저기서 철관음이 꽤 생겼다. 말해 뭐 해. 싱그러운 청향이 가득한 철관음으로 이건 포장해 주시는 분의 취향마저 느껴지는 게 다른 소포장에 비해서 양이 20%가량 더 많았다. 만일 같은 분이 주신거라면 청차는 투차량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취향을 가지고 계신 게 아닐까 싶은데 그것 참 마음에 드는 생각이다. 생각 없이 한 봉지를 다 부으면 재탕 지나면서 개완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의 투차량이다. 사진 찍고 좀 더 큰 개완으로 옮겨마셨음. 역시 철관음은 차를 아끼면 맛이 없다.

정산소종

마지막으로 다시 정산소종. 심지어 얘는 10g이라고 적혀있고 상품번호 등등도 막 다 적혀있지만 실제로 무게를 달아보면 통 안에 찻잎만 16g 넘게 들어있었다. 절반이면 5g이겠지 하고 대충 덜다 보니 아무래도 양이 안 맞는 거 같아서 달아봤던 건데 이것도 웃음 나는 에피소드이다. 좀 더 소포장의 정산소종에 비해서 약간은 더 인스턴트 같은 인상으로 한방에 더 진하게 우러나는데 대신 내포성은 훨씬 더 짧다. 4탕부터 이미 맹물. 작은 통이 너무 귀여워서 그래도 자꾸 정이 가는 친구였다.


하나하나 좀 더 길게 시음기를 적으면 좋겠지만 양이 그 정도로 많지는 않았고 이렇게 인상이 어땠는지 스케치정도 하는 걸로 마무리. 쭉 이어서 달리며 느끼는 건 블라인드 테스트 느낌으로 주는 사람이 이렇게 패키지 구성해서 주는 선물도 뭔가 메세지가 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판매하는 상품에선 할 수 없을 과감한 시도이지만 차를 마시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오랜 기간 구상한 블라인드 패키지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도 재미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년 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선물 시리즈,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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