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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Aug 10. 2023

풋내 나던 순수와 열정의 아득히 먼 그 시절.

루피시아 5110. La Belle Epoque

오드리제이 보부상님의 행낭에서 어느덧 마지막. 루피시아의 베루-에-폿쿠. 벨 에포크는 불어로 아름다웠던 시절, 그러니까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몇 십 년을 이르는 말로 당시 프랑스에서는 기술과 문화가 안정적(이라 믿었던) 평화를 바탕으로 폭발적인 발전을 이루던 시기 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화가들이 이 시기에 활동했고 모짜르트 베토벤 말고 그 이후의 유명한 음악가들이 활동하던 시기 었다.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파리에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빠리지엥이 탄생하던 아름다운 그 시절. 거창하게도 그 벨 에포크를 이름으로 달고 나온 홍차이다.

다즐링에 고쿠 노 아루, 풍미가 있는 홍차를 부렌도 하였고 어딘가 그리운 풍미라고 한다. 노스테르지아까. 루피시아의 오리지널 블랜드로 루피시아에서 가장 플랫 한 블랜딩으로 취급하고 있다. 실제 소개에서도 밀크티, 레몬티, 아이스티 모두 어울린다고 표시해 뒀고 제품 설명에 글로도 강조해 두었다. 곁들이는 티푸드에도 샌드위치부터 양과자 화과자 모두 오케이라고. 플랫 하다는 건 스탠다드를 지향한다는 느낌에서는 좋은 측면이 있으나 모든 영역에서 확실하게 제 몫을 다 해줘야 비로소 레퍼런스급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자칫 레퍼런스급 아닌 플랫은 이도저도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개봉하면 바싹 마른 냄새보다는 살짝 젖은 풀냄새가 섞여있다. 다즐링에 CTC가 섞여있는데 원산지를 보아하니 케냐 CTC인 듯. 드문드문 녹차인지 발효를 거의 하지 않은 다즐링인지 모를 잎도 섞여있다. 원산지가 기타인 차도 들어있는 걸로 보아 녹차인 것 같다. 아님 나름 이 부분이 비법이라 가려놨나. 벨 에포끄 시절 파리의 낭만을 생각해 보면 어딘가 소박해 보인다. 모네라던지 르누아르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던 아마드의 틴 케이스가 생각나는 향이긴 하다.

뜨거운 상태에서는 어텀닐스러운 다즐링 유지되면서 산미가 살짝 있는 케냐 느낌이 난다. 그런데 한 김만 딱 식어도 홍차이긴 한데 잘 모를 맛이 되어버린다. 수렴성이 짙은 아쌈과 실론 그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잃고 헤매이는 느낌이 어딘가 몽환적이긴 하다. 바디감이 좀 있긴 한데 풍미까지는 잘 모르겠고 뭐라 정리가 되지 않으면서 적잖은 수렴성에 혀가 서서히 쪼그라든다. 썩 훌륭하다고는 못하겠다. 신경을 많이 쓰고 마셔서 그렇지 티푸드와 함께하면 아주 무난하게 마실 수 있긴 하다. 떫탕과의 경계선에 있는 느낌. 마치 1차 세계대전을 앞둔 벨에퐄끄의 낙관적 평화로움을 마시는 기분이다. 반대급부로 수렴성이 좀 가신 후까지 여운은 좀 길게 유지되는 편인데 이걸 풍미라고 한건 아니겠죠?


선을 넘어 진함의 영역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약 7~8g쯤을 150ml에 3분 우려서 우유를 100ml가량 넣어보았다. 매1 소화가 잘 되는 우유 오리지널 190ml 팩을 상온에 한참 뒀다가 빨대구멍만 톡 뚫어서 소젖 짜듯 쭉쭉 짜서 넣어본다. 소젖 짜는 풍경을 억지로 떠올려보며 벨 에포킄 베레퐄킄ㅋㅋ 우유가 충분히 따듯하진 않아서인지 마시기 전의 향이 강하지 않다. 한입 호로록 마셔본다. 아니 이것은! 로얄 밀크티까진 아니지만 제법 향이 진하다. 밀크티의 부드러움과 홍차의 풍미가 모두 살아있어서 제법이군 싶다. 의외로 밀크티에 잘 어울림.

아이스티는 그닥 추천하지 않는다. 얼음에 부어서 마시는 순간 다즐링과 케냐의 층이 딱 분리가 되어서 서로 겉도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사이의 큰 간극을 수렴성이 메꿔버린다. 이것은 마치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아마드 틴케이스를 모으고 얼마 되지도 않는 홍차 카페를 돌아다니며 차를 마셔대던 2000년대 초반이 생각난다. 월드컵 미국전 끝나고 집에 와서 마셨던 얼그레이라던지. 생각해 보면 그때가 나의 벨 에포끄였어서 그런가 싶기도. 그 이후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미국에서의 삶은 두려운 마음도 컸고 어려운 위기도 많았지. 그러면서 잊고 지낸 그 시절 태초의 티타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홍차를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그 시절 풍경이 오르세에 걸려있는 그림처럼 아련하다. 도서관의 묵은 책 냄새와 텀블러에 우린 포트넘 잉브 티백의 향이 어딘가 외롭고 그립기도 하고. 몽마르뜨 언덕에서 헤밍웨이가 인사할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물랑루즈에서 뺀찌먹고 한잔 마셨을 것 같은 차라도 지나고 나면 그 시절의 치기 어림 자체가 추억이 되듯 은근하게 노스텔지어가 밀려온다. 맛은 어딘가 좀 어중간하지만 그래서인지 마음 한편이 찌르르하면서 애틋하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어설픈 어린 날을 떠올리는 차, 벨에퐄끄였다. 끜.




추천곡 - 아라베스크 (Debussy)

같은 que 돌림이라 아라베스크를 추천하긴 했지만 같은 앨범의 Reverie (Debussy)도 추천한다. 프레슬러 할아버지 94세에 녹음한 앨범에서 물안개 피어오르듯 아련하게 떠오르는 벨에포크를 담담하고 소박하게, 하지만 그 안에 용광로같이 흐르는 열정으로 들려주신다. 94세가 되어 처음 홍차를 접하던 10대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이런 느낌일까. 직접 찾아 듣는 수고를 일부러 남겨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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