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소리 Aug 16. 2021

사랑의 가면일지도 몰라.

너를 위해서라는 빛좋은 개살구

  우리 집 아이들은 겁이 많다. 큰 애나 작은 애 모두 '높은 곳', '놀이기구', '낯선 사람', '낯선 장소'를 싫어한다. 그중 가장 최악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놀이기구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을 때 겁이 많아서 놀이기구를 잘 타지 않았다. 놀이공원에 놀러 가면 짐짓 잘 타는 '척' 했을 뿐, 실제로는 도망 다니느라 바빴다. 그런 내 모습이 한 친구의 레이더망에 걸렸다. 결국 친구의 손에 이끌려서 바이킹을 연속 세 번이나 타게 되었다. 친구는 제발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하는 나를 질질 끌고 가서 바이킹에 태웠다. 첫 탑승의 순간이 가장 아찔했다. 그나마 친구의 배려로 제일 끝 좌석에 앉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한 번도 들 수 없었다. 마지막 세 번째쯤 놀이기구의 재미를 조금, 아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위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상황에서 냅다 소리를 빽 지르고 나니 어딘가 속이 후련했다. 이 맛에 놀이기구를 타는 모양이구나.

  

  놀이기구를 타거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되는 모양이다. 슬픈 영화를 보고 펑펑 울고 나면 무언가 후련해지는 그런 기분 말이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단단한 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성취감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순간의 감정은 왜 그리 압도적인 걸까? 단 '한 순간'인 감정이 이성적인 판단까지 흐리게 만든다. 내가 그 벽을 허문 순간은 오롯이 친구의 강압적인 이끌림 덕분이었다. 만약 누군가 바이킹을 타면 돈을 주겠다고 했더라도, 나는 손사래를 치며 도망갔을 것이다. 그만큼 내게는 스스로 그 벽을 허물고 싶은 의지나 마음이 없었다.


  사람은 경험이 참 중요하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기구를 타는 순간, 아이들과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순간, 나의 친구처럼 나는 '강압적'으로 아이를 당겼다. 나의 두려움이 깨졌던 것은 온전히 '타인의 도움'이었다. 굳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으므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감정은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막상 친구의 도움으로 두려움의 벽을 부수고 나니, 조금은 후련하고 즐거운 마음이 생겼더랬다. 뒤돌아보니 정말 별 것 아니라는 마음도 생겼었다.


  "괜찮아.",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  아니야.", "막상 하고 나면 엄청 재미있어."라는 온갖 말로 아이를 정신 차리지 못하게  , 팔을 잡아당겼다. 첫째 아이는 주저앉아 20-30 동안 일어나지 못했고, 둘째 아이는  손을 뿌리치고 줄행랑을 쳤다.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붙잡아 기어코 높은 정글짐을  바퀴 돌고야 말았다. 놀이공원에서는 도착하자마자 지금의 아이들이 타기엔 무서운 놀이기구를 탔다. 놀이공원에 다녀온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이야기하며 "절대 절대 절대 절대 타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둘째 아이는 정글짐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극한의 방법으로 아이들을 밀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스스로 용기낼 수 있는 시간까지 기다려줬어야 했던  아니었을까?


  성미가 급하고 결과를 빨리 봐야 하니 과정이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아이들을 향해, 아직 소화가 되지 않은 아이들을 향해 "거봐, 아무것도 아니지? 재밌지?"라고 즐거움을 강요할 때도 있다. 결국 뒤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있겠지만, '순간의 감정'을 세세하게 살피지 못한다. 훗날 아이가 자라나 "지금은 재밌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땐 정말 무서웠어. 엄마 손을 뿌리치고 싶었어."라는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스스로 놀이기구를 타러 나서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첫째 아이가 처음 물놀이를 할 때도 나는 '강압적'으로 튜브에 아이를 욱여넣고 물 위에 떠다니게 했었다. 그날 이후로 아이는 깊은 곳에 들어가도 '튜브'만 있다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그 순간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즐기게 된 것이다. 동일한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며,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아이는 절대 시도하지 않을 거야.'라는 변명을 할 거다. 하지만 '정말 잘한 방법일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결국 다른 모양의 두려움이 두려움을 내쫓은 건 아닐까?


  육아에는 방도와 정답이 없지만, 우선순위는 있는 것 같다. 결과보다 기다림이 우선되어야 하고, 나의 경험보다 아이의 생각이 우선되어야 하며, '너를 위한 마음'이 '너'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 육아를 하는 수많은 순간마다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핑계를 댄 적이 많았다. 싫다는 아이의 말에도 아니라며 나의 생각을 강요할 때가 많았다. 그 순간순간이 어리고 약한 너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그 모든 마음이 사랑이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너보다 커서는 안되었다. 너를 넘어서는 순간, 사랑의 마음은 또 다른 이름의 두려움으로 변할 테니 말이다.

이전 10화 그런데 있잖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