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음의 지름길을 향해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엄마'를 부른다. 엄마를 부른 이후에도 한 번에 자신의 용건을 말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엄마~"라고 뜸 들이거나, "있잖아 엄마."하고 대답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나도 한 번에 대답해주지 않는다. "없는데?", "빨리 말해~", "용건을 말해."라고 대답하기 일쑤이다. 그나마 이만큼 대답하는 것도 양반이다. 자신의 용건을 말할 때까지 대답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럴 때면 "엄마, 엄마, 엄마?"하고 대답할 때까지 나를 부른다. 아이들이 나를 부르지 않을 때면 남편이 나를 부른다. "자기야! 아이들이 부르잖아. 얼른 대답해줘." 우리 집에서 심술쟁이는 엄마인 나뿐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선생님, 있잖아요."하고 말을 꺼내놓으면, "없는데?"하고 대답한다. 내 대답을 들은 아이들은 열이면 열, "아이, 선생니임!"하고 내 팔을 잡고 늘어진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는데 왜 뜸을 들이는 걸까?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이들의 이러한 추임새를 '고쳐줘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서있다 보니,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여력이 없었다. 그 맘 때 아이들은 한 번에 용건을 말하는 지 않는 모양이다.
인터넷 영어사전에서 'right'를 찾아보면 신기한 해설이 나온다.
right 1. 알겠니, 그렇지, 그런데 있잖아(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거나 자기 말을 이해하는지 확인할 때)
2. (도덕적으로) 옳은, 올바른 (<->wrong)
3. (틀리지 않고) 맞는, 정확한(<->wrong)
한국어도 아닌 영어단어에서 의외의 힌트를 얻게 되었다. 아이들이 '그런데 있잖아요'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빠르고 정확한 것만 좋아하는 나 같은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마음이 포함된 말이었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 엄마에게 들려주기 전부터, 엄마의 동의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꼭꼭 숨겨두었던 속마음을 슬며시 꺼내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인터넷 영어사전도 알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니!
너와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 '나의 언어'로 너를 판단하려 할 때가 많다. 나의 언어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이 이상하게 너의 언어가 될 때, 이상한 암호로 변환되어 나온다. 너의 말이 논리적이지 않아서, 혹은 정확하지 않아서 이해하려는 마음조차 갖지 않은 적이 많았다. 그저 너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의해주면 될 일인데, 그조차 하기 싫어서 "이해가 안 돼. 말이 안 되잖아."라고 뭉개버릴 때가 많았다. 그렇게 나의 언어로 너의 마음을 주눅 들게 하고 나서야, 너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나서야, 그제야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아무리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없다면 서로 다른 말을 하게 된다. 분명히 내게도 너와 같은 말을 사용한 시간이 있다. 수많은 시간 너처럼 말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과 마음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지금의 나만 생각하며 고집하는 귀머거리 임금님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너의 말이 도저히 풀리지 않는 암호가 되어버리고,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생기고야 말았다. 용기를 내서 마음을 꺼내어 내뱉은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자신에게 돌아올 때, 너의 마음은 얼마나 뒷걸음질치고 싶었을까?
사람의 말속에는 마음이 숨겨있다는 것을 자꾸 잊어버린다. 정확한 정보, 사실, 객관성을 제외하고도 '감정'과 '마음', '기분', '태도'가 전부 들어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음'이 빠져버릴 때가 종종 있다. 감정이 풍부한 남편은 내게 "당신은 너무 차갑게 말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나는 정확한 사실만 말하는 거야. 그 말을 할 때 나는 아무 감정이 없어."라고 동문서답을 한다. 어서 '나의 언어'에서 '너의 언어'로 의식의 흐름을 바꿔야, '너의 마음'의 지름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