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아이들을 관찰하다 보면 별 것 아닌 일에도 온몸으로 집중할 때가 종종 있다는 걸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은 내 아이뿐만이 아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노라면, '아니 무슨 저렇게까지 온 힘을 다해?'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아이들의 에너지 폭발은 '즐거움'에 맞닿아 있다. 굳이 좁은 길 위에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더러운 상자를 가져와 집을 만들어 들어간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라고 묻는 어리석은 질문에, 아이들은 언제나 현명하게 대답한다. "재밌으니까요." 하다 보니 즐겁고 재밌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땀을 흘린다. 자신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되고, 본인이 생각하는 마무리가 될 때까지 매달리게 된다. 어떤 아이는 '지우개 따먹기'에 열심이고, 다른 아이는 '술래잡기', 또 다른 아이는 '엔트리 로봇'에 온 마음을 다한다. 아이들의 생김새와 성격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즐거워하는 것도 하나같이 다 다르다.
하루는 한 아이가 필통을 두 개나 들고 학교에 등교했다. 가방만 무겁게 뭐하러 필통을 두 개나 들고 다니냐며 필통을 확인해본 순간, 아이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필통엔 지우개만 잔뜩 들어 있었다. 그 아이는 생애를 통틀어 바로 그 지점에 '지우개 따먹기'에 빠져있었다.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틈만 나면 지우개를 들고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나는 지우개 따먹기의 묘미는 '남의 지우개를 쟁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 놀이의 이름도 그에 걸맞게 지어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아이에게 남의 지우개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아이에게 진짜 중요한 즐거움은 지우개 따먹기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별 것 아닌 일에 그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매달린다. 반면에 나는 별 것 아닌 일에 너무 애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이들과 정반대로 걸어가다 보니, 모든 일에 초연해진다는 '어른스러움'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놈의 '어른스러움'을 가지게 될수록 자신이 즐거워서 미칠 것만 같은 일들이 점점 사라졌다. 작은 일에도 온 힘을 쏟아 끝까지 매진하는 법이 없게 되었다. 내 안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 점점 사라지게 된 것이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과 작은 것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 맞닿아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점점 그럴싸한 어른이 되어가는 나는 사라진 열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아이들은 순간마다 이상하고 애매모호한 지점에서 그 열정이 튀어나온다. '모든 일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니 너무 애쓰지 말자.', '괜히 이렇게 매달리다가 또 나만 피곤해질 거야.', '다 부질없어.' 등의 경험치와 보호본능, 자기 연민이 우뚝 솟은 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 위에 올라가 있노라면 그간의 고생과 노력이 물거품 되는 것이 두렵다. 보잘것없더라도 쌓아온 경험치와 나를 보호하려고 만들게 된 여러 장치들을 내버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보호한다고 믿는 그것이 때로는 라푼젤의 탑이 되기도 한다. 그녀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전부였던 탑을 벗어나는 것으로 진짜 삶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실은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피곤해지지 않으려고 '어른스러워지는 과정이야'라는 말로 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처 받을 수도 있고, 돈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 된다 할지라도 온 몸을 내던져 내려가 봐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직면하여 내 안의 열렬한 애정을 쏟고 열중하여 그 순간이 즐겁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결국 아무런 결과 없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더라도, 순간의 의미와 즐거움을 알게 되는 '인생 탐험가'가 될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