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순간을 모아서
주제를 받아 들고 며칠 밤을 고심했다. 다리도 다쳤겠다 핑계 삼아 마감을 미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머리와 손에서 멀고 먼 엄지발가락의 통증이 제일 탁월한 변명이 될 줄이야.
주기적으로 칼럼을 연재하거나, 기사를 작성하는 사람들은 '관심사가 아닌 것'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에도 척척 글을 잘 쓸까. 그래서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있다고들 하는 것인가 보다. 이번 글의 주제는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이다. 한 동안 고심하고 또 생각했다. 언제일까, 누구일까, 내 인생에서 순간의 암흑이 되었으면 했던 때가 말이다. 아무리 머릿속을 쥐어짜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초조해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글모사' 분들에게 다리를 다쳤노라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혹여 마감을 지키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치사한 방법이었다.
메시지를 남겨두고 나니, 괜히 이 모임에 뛰어들었나 후회가 들었다. 일하고 돌아와도 퇴근이 없는 엄마의 삶을 사노라면 정말 시간을 쥐어짜 내어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무턱대고 마감이 정해져 있는 글쓰기 모임이라니, 제정신으로 선택한 길인가 싶었다. '아, 어쩌면 이도 저도 안 되는 지금의 글쓰기를 지우고 싶은 순간이 될 수도 있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고, 내 안의 상처를 보듬어주느라 말이 차고 넘쳤었다. 하루에 한 편씩 꼬박꼬박 쓰고, 다음 글의 주제가 번뜩이며 생각이 났더랬다. 이제야 표현하는 방법을 알아챈 사람처럼, 평생에 단 한마디 말도 못 했던 사람처럼 말이다. 꾹꾹 눌러 담은 이야기들은 매우 소박하고, 사적이었다. 그래서 내겐 가장 따뜻한 이불이 되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 타인에게도 소중할 수 없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욕심을 내었다. 나의 이불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른 사람도 알아채 주길.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꾸준히 공감해주는 독자를 찾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글쓰기'를 통해 '표현하는 즐거움'을 깨닫고 나니, 아무리 소재가 고갈되었다 하더라도, 더 이상 독자가 없는 것 같더라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갈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조각보를 덧대어 만들어놓은 책보처럼, 기억의 조각을 덧이어 이야기보따리를 만들어갔다. 그러던 중에 발견한 모임이었다. 투박한 광목으로 이어진 이불 사이에 고운 실로 수를 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아무리 자신 없는 주제라 할지라도, 마감을 지키지 못할 옹졸한 핑계 뒤로 숨을 수 없는 노릇인 게다.
어쨌든 내 삶에 지우고 싶은 순간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머릿속을 휘저어봐도 동동 떠오르는 기억들조차 '나중에 이 기억 조각을 이어 붙여 또 다른 이불보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물론 내게도 잠들기 전, 이불 킥을 수차례 날리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또한 밋밋한 인생길에 간간한 양념이 되어준다. 땅을 치고 후회하며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존재한다. 그 모든 순간이 쌓여 나를 포근하게 안아준 이불이 되었다. 나는 한 없이 나약하고 연약하지만, 기억의 조각들은 꽤나 단단했고 때로는 부드러웠다.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은 시간, 이름, 순간이 여전히 남아있다. 학창 시절의 어려웠던 시간, 서로에게 아픔이 되었던 이름들이 먼지처럼 흩어져있다. '아니야', '이미 지나간 일이야'라고 치부하고 던지기 어려운 순간도 남아있다. 그런 모든 먼지 같은 순간들의 기억을 끄집어내었었다.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려, 아파했던 어린 나의 손을 잡아주었었다. 꽁꽁 숨겨두었던 그 날의 나를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어주었더랬다. 그렇게 흩날리던 먼지들은 날실이 되고 씨실이 되어 주었다. 기꺼이 가장 보통의 투박한 이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