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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Apr 10. 2021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 이름의 세계가 있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많았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없었지만, 보는 눈은 있었다. 남들처럼, 남들보다, 남들이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나의 이런 욕구는 내 삶의 여러 가면을 만들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이었으리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달음박질하는 삶은 고달팠다. 우선 보란 듯한 대학에 들어가야 했다. 좋은 학생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명예는 대학의 간판이 아니던가. 공부를 해야 하는 필요성과 이유는 차치되었다. 공부의 결과가 더 중요했다. 처음부터 기를 쓰고 노력한 것은 아니라서, 학사편입을 한 뒤에야 보란듯한 간판을 걸치게 되었다. 간판을 등에 업고 나니 만족할 줄 알았던 욕심 주머니는 재빠르게 공간을 늘렸다. 그래서 꾸역꾸역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공부에 타고난 성향이 아니었음에도, 결과의 열매는 무척 달았다. 더 달콤하고 더 반짝일 것만 같은 열매를 따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었다.


  대학원에 입학을 맞이한 뒤의 열매는 역시나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열매의 맛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욕망에 취해 달콤함을 누리기엔 현실이 너무 팍팍했다. 주변에는 공부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천지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논문을 읽고, 쓰고, 자료를 분석하고, 발표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좁고 캄캄한 연구실에 앉아 밤을 새워 서로의 연구 주제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 어디에도 낄 수 없었다. 애초에 '공부가 업이 될 수 있겠다'는 마음보다 '교수'라는 타이틀에 방점이 있었다.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했던, 마음과 자세보다 이미지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버티기로 결심했다. 내게 맞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끝내 이뤄 내야 하는 결과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두 세 학기쯤 보내고 나니,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가 보였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매일을 살아야 했으니 성한 곳이 있을 리 없었다. 늘 마음보다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지 않는가. 나의 몸은 경고를 지나 위험을 알렸고, 결국 한 학기를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갔지만 버티기가 어려워졌다. 그렇게 한 두 학기를 더 보내고, 나의 욕심으로부터 도망쳐 버렸다.


  도망쳐 나와보니 다시 무언가 시작할 나이가 아니었다. 이미 어느 곳에서든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기대치가 있는 나이였다.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었다. 질문에 쫓기듯 학원 강사를 시작했다. 강사에 뜻이 있거나, 강사로 대박을 내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매일의 삶이 물속 깊은 곳에서 잠영을 하는 것 같았다. 숨 쉬기가 어려웠지만 물 밖으로 나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바득바득 해초의 끝을 잡고 있던 그 순간 또 한 번의 경고음이 들렸다. 몸이 또 한 번 위험을 알리기 전에, 결국 일을 그만뒀다.


  처음으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늘 내 옆을 달랑거리며 붙어있던 욕망 주머니도 모습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헤매던 순간, 예상치 못한 그 시기에 나는 '엄마'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내게 이상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그 순간엔 미쳐 알지 못했다. '엄마'라는 이름이 갖게 되는 상당한 무게에 대해서 말이다. 다른 것을 돌아보고 생각할 여유 없이 이미 붙어버린 이름표에 매진하였다. 월급이나 커리어, 출퇴근이 없는 이상한 이름. 늘 타인을 먼저 돌봐야 하는 이타적인 삶만 남은 벗어나고 싶은 이름. '엄마의 이름'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것 투성이었다.


   이름은 떼고 싶다고 벗어나지는 것이 아니었다. 도망치듯 나와버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아채지 못했을 , 나의 욕망 주머니는 계속해서  옆을 달랑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모든 소리를 덮고 있었다.  이상한 이름 속에서, 그제야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제때 화장실을  시간도,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길 시간이 없음에도, 아이러니한 '직면'시작되었다.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녹록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고, '왜 그랬을까'를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기억 조각들 속에서 '나'에 대해, '나'와 얽혀있는 모든 '시간'과 '너'에 대해 생각했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이 올라와 '너는 원래 어두운 색깔이었어.'라고 말했다. 감추고 싶은 기억이 스물 거리며 '너는 이것밖에 안돼.'라고 속삭였다. 그 모든 순간에 그저 '엄마'를 보며 방긋거리는 아이를 가만히 안았다. 마치 내 안의 아기를 나의 아이가 안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가 자라나는 그 모든 순간에 나도 함께 자라났다. 마음속에 감춰져 있던 어린아이를 꺼내, 내 아이와 함께 어르고 달래었다. 여전히 내 아이가 더 자라야 하듯이, '나'도 더 자라날 순간이 끝없이 찾아온다. 수많은 이름들 사이에 내게 온 '엄마'는 자녀만 돌보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엄마의 세계에서 덜 자란 '나'를 돌아보며 손을 잡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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