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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Aug 20. 2021

진짜 '장난'은 말이지.

얼마나 즐겁다고:)

  나는 장난치는 것을 좋아한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장난치고, 일흔을 바라보시는 엄마에게도 멈출 줄 모른다. 장난치면서 서로 즐거워하고 웃게 되는 순간, 마법처럼 생기는 감정의 변화를 느끼기 때문이다. 서로 웃고 떠들고 가볍게 농담하는 사이에 눈 녹듯 마음이 풀어진다. 사르르 녹은 마음은 서로에게 달라붙어 관계에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 잠들기 전 아이들과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면서 한바탕 웃고 나면 하루에 쌓였던 고단함이 눈 녹듯이 녹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장난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하면 '까르르' 하고 웃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제각각 모양과 방법은 다를지라도, 스스로에게 맞는 웃음의 통로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말장난을 하다가 웃음의 길이 열리기도 하고, 놀이를 하다가 마음의 문까지 열리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장난치는 것을 제대로 '학습'시키는 부모는 없다. 제대로 장난을 '잘' 치라고 선행을 시키는 부모는 더더욱 없다. '장난'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리라.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표준국어대사전에 '짓궂게 하는 못된 짓'이라는 의미가 실려있다. '주로 어린아이들이 재미로 하는 짓'이라는 의미에서 확대되어 '짓궂게 하는'이라는 의미가 덧붙인 것이 '장난'의 이미지이다. 나는 그 부정적인 이미지가 진짜 '장난'과 '폭력' 사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른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학습 선행보다, 진짜 '장난'이 뭔지에 대한 가르침이 더 시급한 게 아닐까?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을 만들어줘야 진짜 '장난'이 되는 법인데 그걸 제대로 배운 아이들이 드물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신이 책임지고 싶지 않은 행동에 "다 장난이었어."라는 가벼운 말로 무마하려는 말들이 난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장난'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 말과 행동은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는다. 단어가 가진 가벼움 때문일까, '장난'이라는 가면을 쓰고 '일부러 괴롭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난'이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장난이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진심을 담아 마음으로 말한다. "미안해."라고 말이다.


  '장난'이라는 단어는 작란(作亂)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난리를 일으키는 것'이 단어의 유래이니, 지금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긴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장난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장난'이 가지고 있는 진짜 힘을 통해 그 이미지가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순수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퍼트리는 행복한 기운이 얼마나 큰 위력을 갖고 있는지 모두가 느꼈으면 좋겠다.


  잠들기 전 아이들 사이에 누워 옆구리 찌르기, 아이들의 말에 끝말잇기로 대답하기, 술래잡기하면서 뛰어다니기, 함께 씽씽카 타면서 노래 부르기, 뒤에서 앉아있는 아이에게 까꿍 하기, 눈 마주치면 메롱하고 씩 웃어보기, 장난감 놀이하며 변화무쌍하게 변신하기, 노랫말 바꿔 부르며 신나게 웃기, 입으로 방귀소리 내기 등등 셀 수 없는 장난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매일 밤 아이들과 함께 한바탕 장난치고 잠들면, 왠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잠들게 된다. 진짜 제대로 된 '장난'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것이라 믿는다.


 너를 웃게 해주고 싶은 나의 마음이 너에게 닿아 웃음으로 피어나는  말이다. 진심으로 너를 생각하지 않으면  사이에 피어날 수 없는 웃음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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