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지수 Mar 15. 2022

런던 하우스 메이트


내가 비건이 된 이유를 쓴 글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나도 모르게 채식 위주로 먹고는 있었지만 ‘내가?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던 나를 채식의 길로 인도한 것은 같은 집에 살던 카리다. 


카리는 치즈를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치즈 때문에 채식은 해도 유제품은 포기하지 못한다고 했다. 2017년의 마지막 날, 카리는 지난 6개월 동안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2018년부터는 유제품을 먹는 채식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다진 콩고기를 사 와 볼로녜제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그날까지만 해도 “나는 채식주의자는 못할 것 같아.”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카리가 만든 채식 볼로녜제 스파게티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2018년 1월, 평소에도 좋았던 책을 열렬히 추천하는 카리는 나에게 추천해줄 책이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채식주의자'가 된 카리에게 나도 줄 책이 한 권 있었다. 6개월 전 런던 시내에 불교 절인 줄 알고 들어간 허리 크리슈나 템플에서 사람들이 갑자기 일어나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고 식겁하며 나가는데, 어떤 분이 내 손에 쥐어준 작고 얇은 채식 레시피가 담긴 책이었다. 제목은 The Higer Taste. 받긴 받았지만 채식에는 관심이 없고, 요리는 온라인 레시피를 보고 내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손이 가지 않았다.


나는 읽지 않았지만 채식을 시작한 카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럼 나도 너한테 줄 책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한 다음 방에서 먼지를 털며 그 책을 가지고 내려왔다. 카리가 가방에서 꺼낸 책은 내손에 있는 그것과 똑같았다. 서점에서 구할 수도 없는 책을... 둘이 서로에게 알려주겠다고 들고 있었다. 카리는 이 책을 이제 막 읽기 시작했는데 나에게도 꼭 추천해주고 같이 읽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책을 읽고, 나도 채식을 결심했다. 소젖과 닭알까지는 먹는 채식을.


결심을 하고 SNS를 둘러보며 채식을 검색했더니 <유제품이 뭐가 문제야?>라는 짧은 영상이 나왔다. 유제품의 맛을 좋아하던 나였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니? 궁금해졌다. 여성 소를 강제 임신시키고 갓 태어난 송아지를 빼앗는 ‘관행’, 소젖은 칼슘이 풍부하고 건강에 좋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새끼를 빼앗긴 어미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듣고 나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카리에게 달려갔다. “카리, 너 이거 알았어? 이제 소젖이고 닭알이고 다 필요 없고, 나는 비건 해야겠어. 너도 이거 한번 봐봐.” 매번 장을 볼 때마다 치즈를 사는 걸 빼먹지 않고, 거의 매일 치즈를 먹는 카리였지만, 곰곰이 생각하더니 자기도 역시 비건이 되겠다고 했다. 고마웠다. 한 집에 사는 카리랑 함께 한다는 게 큰 힘이 되었다.


치즈를 좋아하는 카리는 비건 치즈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한 번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온 카리가 나를 불렀다. “지수!! 이거 치즈 좀 먹어봐 소젖 치즈랑 맛이 너무너무 똑같아!” 맛을 보았다. 좀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소젖 맛이 느껴졌다. “이거 비건 치즈 확실해? 성분표 확인했어?” 그제야 카리는 뒤를 돌려 성분표를 확인했다. 


...


소젖 가루가 들어있었다. 보통 글루텐 무첨가Gluten Free, 유제품 무첨가Dairy Free, 유당 무첨가Lactose Free 제품을 진열해 비건 제품도 찾을 수 있는 “Free From”코너에 있어서 당연히 비건이겠지 하고 그냥 집어온 것이다. 카리는 실망했고 속상해했다. 나도 며칠 전 깜빡하고 성분표 확인을 하지 않아 소젖 치즈가 들어간 페스토를 사 왔기에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이 장을 보러 가고,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었다. 카리는 비건이 되기 전부터 자주 갔던 맛있는 비건 식당에 나를 데려갔고, 그 식당은 내 온 동네 친구들을 다 데려간 불변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비건 식당이 되었다. 우리는 같이 런던 비건 나잇London Vegan Night이라는 비건 이벤트도 다녔다. 새로운 소식이나 맛있는 비건 제품, 식당을 찾으면 서로 알려주고, 같이 가서 먹었다. 비건 카페를 가고, 비건 식당을 갔다. 초보 비건 시절, 같은 집에 사는 카리가 함께한 건 정말 큰 행운이자 행복이었다.


비자가 끝나 나는 영국을 떠났고, 카리는 런던을 떠나 브라이튼에서 살고 있다. 이젠 우리는 같이 살지 않지만 카리도 나도 비건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얼마 전, 카리는 브라이튼에 새로 오픈한, 내가 너무너무 가고 싶어 하는 비건 피쉬 앤 칩스 가게에 가서 사 먹고 영상을 찍어서 보내줬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꿉친구 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