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제2 외국어 선택지에는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가 있었다. 독일어는 거칠고 딱딱하고 어렵다고 그러던데...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복잡한 언어는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우리말과 비슷해 상대적으로 쉽다는 일본어를 선택했다.
사람일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일본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독일은 벌써 세 번째다.
영국에 살 때에도 독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독일을 가게 된 건 영국에서 최대한 육로로 집까지 가는 길목에 있고, 독일에 있는 명상센터가 좋고, 베를린이 비건 천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들 독일 사람들은 영어를 다들 잘하기 때문에 영어로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예, 아니오, 입구, 출구 같은 최소한의 단어와 문장은 외워지는 것만 외웠다. 어차피 여행이 끝나고 나면 잊히겠지.
독일어는 사물에 성별이 있다. 여성, 중성, 남성에 따라 관사가 붙는데 규칙 같은 건 명확하지 않고 그냥 다 외워야 한단다. 베를린에서 만난 독일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언어에 붙여진 성별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내가 “나는 만약 독일어나 사물에 성별을 붙이는 언어를 배운다면 다 여성으로만 말할 거야.”라고 했더니 실제로 독일에서 일부러 성별을 다 중성이나 여성으로만 말하는 독일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남녀를 여남, 부모님을 모부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느낌일까?
독일의 명상센터에서의 2주 수련을 마치고 이어서 5주 동안 봉사를 했다. 명상센터는 영어와 독일어가 같이 쓰인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항상 한 명 정도를 제외하면 다들 영어를 곧잘 했다. 나에게는 영어로 해주지만 독일어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독일어는 생각보다 그렇게 딱딱하고 거칠지 만은 않았다. 독일어를 몇 주 들었다고 두 번째로 간 빈에서 독일의 독일어와는 다른 억양을 느낄 수 있었다. 몇 가지 주워들은 단어까지 알았다.
내 삶에 독일어가 ‘필요’해 지는 날이 왔다. 독어는 아무리 영어랑 비슷하다고 해도 훨씬 복잡하고 낯선 발음도 많다. 처음 목표는 일단 글자를 보고 소리 내어 읽을 수 있고, 들으면 뭐라는 건지 알아들을 정도. 대부분 독일인들은 영어를 잘해서 영어로 말해도 대부분 알아듣기 때문에 영어를 아예 모르는 독일 할머니나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조금 할 수 있을 정도. 성별은 전부 중성이나 여성으로 말하기. 놀랍게도 독일어에 존댓말이 있지만 그냥 반말로 하기. 나는 외국인이니까 말이 통하기라도 하면 다행이 아닌가. 사실 동양인들에게는 영어로 말하는 독일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독일에 오래 산 친구는 영어보다 독일어가 훨씬 편한데도 독일인들이 자꾸 영어로 말해서 독일어로 말해달라고 할 때가 종종 있다고.
나는 언어를 배울 때 원어민과 의사소통하는 듣기와 말하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독일어를 잘하게 된다면 독일어로 쓰인 독일의 철학책을 읽는 것도 좋겠지만 처음부터 목표를 너무 높게 잡거나 ‘공부’로써 접근한다면 금방 하기 싫고 지루한 것이 되어버릴 것 같다. 한국에서는 각종 코로나 규제도 그렇고 따로 하는 일도 있어서 학원은 찾아보지도 않았다. 독일에 계신 분께 유튜브 <German with Jenny> 채널을 추천받았다. 기초도 없지만 그냥 들어봤다. 그냥저냥 들을 만은 했지만 내 수준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확신이 없었다.
비자를 받으려면 독일어 A1시험 점수를 내야 한다. A1이라 하면 가장 기초단계이고 보통 유학생들은 B1-C2점수를 내야 한단다. 독일에서 유학을 한 친구는 A1 시험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그만큼 독일어 시험 가운데 가장 쉽다고 하지만 ‘시험’이라는 것을 꼭 봐서 점수를 내야 한다니. 시험을 보려면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이건 너무 복잡하고 헷갈린다. 코로나 시국이라 시험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겠고, 마스크를 쓰고 시험을 봐야 한다니.
유튜브에는 영어로 독일어를 가르쳐주는 채널이 여럿 있다. 그러던 중 <Emily mit ypsilon>이라는 채널을 찾았다. 독일어를 한국어로 찰떡같이 번역하는 능력이 있는 에밀리 님은 본인의 독일 살이 경험도 이야기해주고, 동화책을 읽기도 하고, 꼼꼼하게 독일어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독일어 공부를 하다가 지칠 땐 에밀리 님의 영상을 본다.
유튜브와 함께 언어 배우기 앱인 듀오링고를 한 달간 플러스로 사용해봤는데 게임 같이 쉽고 짧게 집중해서 할 수 있었지만 말이 잘 안 되고 이상한 부분도 많고, 설명을 그렇게 친절하게 해주지 않아서 관뒀다.
같은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쓰던 독일어 책도 나눠주었고, 독일인이 독일어 단어장도 사줬지만 복잡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건 변함이 없었다. 독일어 책은 듣기 파일이 CD로 들어있었는데 내 노트북으로는 CD가 재생이 안 된다. 단어장은 발음을 듣고 싶으면 검색해서 듣거나 집에 있는 독일인한테 읽게 시켰는데 흥미가 영 생기지 않고, 지속하기도 힘들었다.
아무리 쉽게 알려준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방식의 수업은 찾기가 어려워 아무래도 온라인 독일어 코스를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마음에 쏙 드는 독일어 배우기가 있는 주로 정보전달을 하는 dw라는 사이트를 찾았는데 심지어 무료이다. https://learngerman.dw.com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를 배우고 연습하기가 좋고,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나씩 필요한 내용을 설명해준다. 단어는 성별, 단수 복수, 비교급까지 알려주며 매 소단원마다 단어, 문법, 문화를 알려주는데 단어나 문법은 따로 또 공부할 수 있게 되어있다.
처음에는 쉽고 어느 정도 아는 게 나와서 하루에 대단원 하나씩 하다가 이제는 소단원을 하루에 하나씩 하는데 4-50분 정도가 걸린다. 처음에 더듬더듬 단어를 읽을 때에는 보고 읽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유튜브에서 알려주는 문법이 어려워서 불평을 하다가 어느새 이제 뜻은 잘 몰라도 읽을 수는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처음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언어를 한두 달 만에 잘하고 싶지만 그만큼 노력은 안 하니 힘이 들 수밖에.
독일어를 배우면서 뭐 이런 언어가 다 있나 참 길고 불편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 언어는 당최 효율성이 없어 보인다. 숫자를 세는데 45는 글자 그대로 ‘5 그리고 40’인데 띄어쓰기도 안 한다. 숫자를 말할 때 265583 이면 굳이 두 개씩 떼서 ‘6 그리고 20, 5 그리고 50, 3 그리고 80’이라고 읽는 것을 보면, 아니 뭐 이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나? 독일인한테 물어봤더니 본인들도 헷갈린다고 한다.
독일인이 한국어로 숫자 읽기를 배워볼까? 이러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규칙적이냐고 묻길래 처음부터 끝까지 규칙이라고 그냥 숫자 일부터 십까지 알면 그냥 그대로 읽으면 된다고 알려줬더니 몇 가지를 읽어보더니 너무 쉽다고 했다. 사실 외울 필요도 없지. 그냥 한글 읽는 것만 배우고 일부터 열까지만 외우면 끝인데. 내가 독일어를 배우면서 왜 이렇게 짜증을 내는지 조금 알겠지?
직업을 말할 때에는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따라 단어가 나누어져 있는데, 대부분 앞까지는 비슷한데 여성 직업인은 뒤에 rin을 붙여서 조금 더 길다. 이 또한 단수, 복수에 따라 단어가 달라지므로 우리말로는 택시기사라고만 하면 될 것을 독일어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에 따라 네 가지나 알아야 한다...! 시간을 말할 때에는 ‘5시 반’을 ‘반 그리고 6’이라면서 지금 시각+1을 한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에 따라 문장 구성요소가 정해진다. 내가 독일어는 정말 이상하고 어렵다고 했더니 한 독일 분은 “독일인들도 독일어를 그렇게 잘하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불만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점수를 받고 나서도 계속해서 다음 단계를 지금처럼 하루에 하나씩 계속할 생각이다. 먼저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친구들은 어느 정도 지나니 독일어가 재미있다고 하는데 나도 시험의 압박이 없다면 지금보다는 편하고 재밌게 배울 수 있을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