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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비 Mar 04. 2022

어느 날 우리 집으로 감염병이 들어왔다

COVID19 그리고 RSV와 공존한 일주일


토요일 오전, 남편은 자가진단키트에 한 줄이 나온 것을 확인한 후 서둘러 집을 나섰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선 내 눈에 남편이 두고 간 키트가 눈에 보였다. '앗 그냥 두고 갔네. 치워야겠다.'하고 생각하며 들여다봤는데, 뭔가 이상했다. 매우 흐릿하지만, 분명 눈에 들어오는 또 다른 한 줄. 


평온하던 우리 집에 숨어 들어온 감염병 1호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 전날, 남편 동료가 확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사무실에 있던 남편도 연차를 내고 집에 돌아왔다. 남편은 몸에 큰 이상이 없었고 자가키트 결과도 음성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외출 전에 한 번 더 해본 건데, 두 줄이 나타난 것이다.


10분이 흘러 뒤늦게 나타난 데다가 너무 흐릿해서 자칫 지나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난임으로 수많은 임신테스트기를 하며 '매직아이'로 단련된  눈은 '뭔가 다름'을 포착해냈다.


출처: pixabay


남편에게 전화하자, 예약한 일정을 취소하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 앞에서 지퍼백으로 밀봉한 키트를 받아들고 선별진료소로 가서 PCR 검사를 받았다. 나는 그동안 집 구석 구석을 소독하고 환기했다. 남편은 귀가하자마자 바로 안방에 격리되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남편이 PCR 검사 음성이라며 안방 문을 열고 나와 환하게 웃었고,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식탁에 밥을 차려 함께 맛있게 먹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주말...


"카톡!"

알람 소리에 꿈에서 깨었다. 남편이었다.

"양성 나왔어..."

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는 서둘렀다. 남편은 확진자가 되었고, 나와 아이는 동거가족이므로 속히 PCR 검사를 받아야 했다.


토요일에 격리 시작이었는데, 이 문자를 월요일에 받았다. 얼마나 일이 밀렸으면... 그저 이 상황이 안타까울 뿐


2년 전에 이사 온 이후 운전대를 한 번도 잡은 적이 없었다. 전에 살던 곳보다 차들이 많아 겁이 난 탓이다. 하필이면 이때, 그것도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한다니!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이는 서툰 내 운전으로 멀미가 났는지 선별진료소에 도착하자마자 아침에 먹은 우유를 다 게워냈고, 만성비염으로 늘 민감해져 있는 코가 사정없이 쑤셔지는 고난을 겪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받은 검사 결과는 나도 음성, 아이도 음성이었다. 안도한 것도 잠시, 이번에는 감염병 2호가 아이에게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격리 3일 차인 월요일 아침, 아이가 계속 기침을 하고 열이 39도까지 올랐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기침 소리였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가래가 끓어오르다 아이의 목젖을 막으면서 기침이 터져 나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얼핏 듣기에도 심상치 않은 소리였다.


나는 3차 접종 완료자라서 필수 목적의 외출과 병원 대리처방이 가능하긴 했지만, 확진 판정을 받고 안방에 격리된 남편에게 갓 세 돌이 된 아이를 맡기고 외출할 수는 없었다. 도와줄만한 양가 부모님이나 친척도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을 뒤져 비대면 진료 애플리케이션으로 약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아이의 증세는 계속 심해졌다. 수요일까지는 잠을 자다가 깨어 기침하다 토하고, 서럽게 울었다. 옆에서 돌보는 내가 괴로울 정도였다.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도 안방에서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남편 또한 괴로웠을 것이다.


격리 생활과 기침으로 지친 아이는 갖가지 놀이를 개발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실제로 울지는 않았다. 남편은 허약한 나마저 쓰러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로, 나는 멀쩡했다. 남편 밥과 아이 밥을 따로 차리고, 남편이 사용한 화장실을 소독하고(안방에 화장실이 따로 없어 시간차를 두고 이용했었다), 수시로 환기하고, 아이를 간호하는 그 모든 과정을 버텼다. 어쩌면 내 몸이 '지금은 응급 상황'이라는 걸 알고 협조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고열, 기침, 가래... 증상만 보면 영락없는 코로나였지만, 자가진단키트를 몇 번이나 해 보아도 계속 음성이었다. 이만큼 증세가 심하면 모든 결과가 확고하게 음성일리는 없을 텐데? 그제야 나는 코로나가 아닌 다른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마침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소식을 듣고 전화를 해주셨는데, 같은 반 아이들 몇 명이 비슷한 증세로 결석했지만 코로나 결과는 모두 음성이라고 했다.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들이 몇 개 있었다. RSV(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 파라바이러스?


어차피 코로나나, 다른 바이러스나, 뚜렷한 치료제는 없다. 결국 약은 대증요법을 할 뿐, 근본적인 치유는 몸의 면역체계가 해야 한다(비대면 진료를 봐주셨던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다만 영유아처럼 고위험군은 폐렴이나 기타 합병증으로 발전할 위험이 크고, 입원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가 숨을 쉴 때 가슴 한복판이 옴폭하게 들어가거나, 열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오르면 바로 병원이나 119에 전화해야 한다고 하셨다. 다행히 아이는 기침이 심하긴 했지만 숨이 가쁘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목요일을 기점으로 증세가 뚜렷하게 호전된 게 느껴졌다.


격리 6일 차, 아이와 나는 격리해제검사를 받으러 선별진료소로 향했다. 아이는 오랜만에 밖을 나오니 그조차도 신난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그랬다. 선물 같은 햇빛, 선물 같은 바람...


선별진료소의 하늘, 시리도록 푸르다


나와 아이의 최종 PCR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고, 남편도 자동으로 격리 해제되었다. 우리 가족의 '바이러스 잔혹사'도 끝이 보이고 있었다.






격리가 해제된 토요일, 나는 아이를 데리고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바이러스 검사에서 RSV 양성 소견이 나왔다. 아이를 그토록 괴롭히던 감염병 2호의 이름을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다행히 엑스레이 상으로 약간의 기관지 염증이 있긴 하지만 폐렴이나 기타 위험한 소견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의 면역 체계는 처음 들어온 바이러스에 맞서 잘 버텨주었다.


일주일 동안 시달리고 응급실로 온 와중에 브이를 하는 딸내미. 내가 낳았지만 멋지다.


이미 다른 바이러스가 선점(?)해서였는지, 나와 아이는 끝까지 코로나의 침입은 받지 않았다.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어서 반은 마음을 비워놓았었는데 릴레이 확진은 피했다. 다만 옆에서 아이를 계속 돌보던 나는 결국 RSV에 전염되었고, 중이염으로 발생해서 한동안 고생했다.


오미크론 폭증세에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계속 보냈던 이유는, 아이의 어린이집이 폐원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가 아이에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추억이었다고 생각했기에, '수료식 때만이라도, 제발...' 간절한 심정으로 등원을 시켰다.



그러나 어린이집을 맴돌던 RSV는 결국 우리 집 현관문 안까지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거의 비슷한 시점에 남편의 회사를 맴돌던 COVID19도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 동안 무시무시한 감염병들과 '불편한 동거'를 했다.


끝끝내 아이는 어린이집 수료식에 가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마음 아픈 부분이다.


평소에도 감기계의 얼리어답터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면역력이 약한 나이긴 하지만,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바이러스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래도 (확률은 극히 낮다지만) 코로나와 다른 바이러스에 동시 감염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입원은커녕 대면 진료도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가 버텨줘서, 안방에서 남편이 홀로 코로나 증상과 싸워줘서 고마웠다. 무엇보다 허약한 내 몸뚱이가 눈치껏 안 퍼지고 견뎌줘서 감사했다. 체력을 후불로 당겨 쓴 건지, 약 2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여파가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 집을 찾아온 이들이 가급적 다시 찾아오지 않았으면 한다... 경험은 한 번만으로도 충분하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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