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목처럼 뿌리내린 사람들을 생각하며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취업이 확정되고 나서 머리를 자르러 시내에 나갔다. 머리를 자르고 난 후, 산뜻한 마음을 담아 로또를 사려고 정류소 앞 슈퍼에 들렀다. 계산대에는 익숙한 분이 앉아 있었다. 예전에 내가 중고등학교 때, 아니 그전부터 자리를 지키던 슈퍼 아주머니였다. 머리가 하얗게 되고, 주름이 더 늘어났을 뿐, 앉아 있는 모습과 눈빛, 목소리, 계산하는 모습은 옛날과 똑같았다. 달라진 점은, 옛날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후다닥 컵라면을 먹던 중학생이 이제는 로또를 사러 오는 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슈퍼를 나오면서 ‘와, 아직도 하고 계시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
요 며칠 동안 사무실 이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새로운 사무실 건물 1층 밖에는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계셨다. 모자와 목도리를 꽁꽁 둘러메고, 계단에 간이 방석을 깔고 앉아 계신 아주머니에게 인사차 물었다.
“오늘 날씨 많이 춥네요. 일 한지 얼마나 되셨어요?”
“18년 됐어요.”
대학교 졸업식 날 샀던 구두 뒷굽이 다 떨어졌다. 덜렁거리는 구두 뒷굽을 수선하기 위해 은행 옆 구두방에 들렀다. 아저씨가 구두를 수선하는 동안 앞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이렇게 물었다.
“아저씨, 예전부터 계셨던 거 같은데, 일 한지 얼마나 되셨어요?”
“가만 보자... 한 45년됐슈.”
사실 나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예전에 누군가 나에게 ‘넌 어떻게 하고 싶은걸 다 해?’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걸 왜 못해? 하고 싶으면 하면 되잖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상황이 더 많다는 걸 조금씩 가깝게 느끼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경험하는 것도 그동안 내가 가진 특권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 생존에 있어 겸손해지고 함부로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 앞으로도 내 삶에 있어서 먹고사는 일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미루지는 않으려 노력하겠지만, 이제는 최소한 훈계하듯이 말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일주일에 6일을 일하고 나서 어쩌다 쉬는 일요일에는 밀어두었던 건강원 일을 한다. 요새는 날이 더워지면 작업이 힘든 칡즙을 주로 내린다. 칡을 두어 번 갈고, 즙을 짜내고, 봉지에 담는다. 그렇게 반나절이 흐르고, 주 7일 근무가 완성된다. 이른 초저녁,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 “아니, 일주일에 하루는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창문 밖으로 싸라기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슈퍼 아주머니와 요구르트 아주머니, 구둣방 아저씨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