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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Mar 16. 2020

단골가게가 갖고 싶었어요

딱히 바라는건 없습니다만


     이사를 하면 제일 힘든 건 단골 가게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동네에 오래 살았던 만큼 나만의 루틴이 있는데 새로운 곳에서 내 마음에 드는 루틴을 만드는 건 그만큼 힘이 들고 품이 드는 일이기 때문.

 

     나는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한 동네에서 나왔다. 그래서 나에겐 어렸을 때부터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주욱 나를 보살펴주신 어른들이 많이 계셨다. 일종의 단골가게라고 할 수 있겠는데. 철마다 예방접종을 해주신 의사 선생님, 꼬꼬마 시절 맛있는 약(이름이 뭐였더라 틴틴?) 을 사겠다고 떼쓰던 모습부터 나의 처음 화장한 모습까지 기억하시는 약사 선생님, 가장 처음 파마를 해주셨던 미용사 선생님, 나의 첫 안경부터 렌즈까지 함께 해주신 안경원 선생님, 스무 살이 되어 처음으로 친구들과 술을 먹으러 갔던 동네 술집의 사장님 등등. 하지만 내가 그들을 두고 고향같았던 동네를 떠나게 되었다.


     지금 사는 동네에 이사 오고 가장 처음 느꼈던 감정은 '막막함'. 이제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지금까지 내가 아팠던 히스토리와 나의 증세들을 잘 알고 있던 나의 외장 하드 같은 분들이 사라졌으니) 가볍게 한잔하고 싶으면 어디를 가야 하는지, 자라나는 검은 머리를 염색 하려면 누구한테 가야 하는지 등등 생활의 기초적인 부분부터 고민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단골가게라는 걸 만들어 본 적이 없다 보니 만드는 방법조차 몰랐던 거다. 30대가 되는 이 나이까지. 대학교를 다닐 때에도 나는 이렇다 할 나만의 단골가게가 없었고 그 이후에도 나는 매번 새로운 곳을 가는 것을 좋아해서 데이트를 할 때에도 친구들을 만날 때도 매번 다른 장소를 찾았다. 그러다 보니 나에겐 단골가게라는 게 없을 수밖에.


     하지만 새로운 지역에 터를 잡고 나니, 나만의 추억이 새겨져 있는 장소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새로운 장소에서 몇년이 지나자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다. 회사에서도 팀분들 덕분에 자주 가게 된 나름의 회식 단골 가게들이 생겼고(진짜 내 애착 가게들이었지만 이제 모두의 가게.), 기타 생활 편의 시설도 자리 잡아가고 있다.




     오늘 미용실을 다녀왔다. 여기를 다니게 된 것도 이사를 오고 나서 여러 곳을 다니며 헤매다가 정착하게 되었는데, 꾸준히 때마다 오게 되며 안부 인사를 묻는 장소가 생긴다는 것이 바로 단골 가게가 생겨나는 시발점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런 관계 형성은 나에게 꽤나 큰 안도감을 준다. "오셨네요?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번엔 어떻게 할까요?" 등 누구에게나 하는 그저그런 영업성 멘트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꽤나 안도감을 주는 스몰톡.


 그래, 단골가게란 이런게 아닐까.
- 서로의 과거를 기억하고 새로운 안부를 묻고
- 상대의 미래를 물어보며 우리가 대화하지 못했던 공백기 동안의 변화를 감지하고
- 나의 특정 분야에 관한 백업디스크가 되어주는 곳
(물론 이 모든 것엔 내가 그만큼 소비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음 -> '가게' 라는 특정 공간이기에. )


     누군가 나에게 '너는 단골 가게가 있어?'라고 묻는다면 단연코 말할 수 있는 나의 가게 중 하나. 이 미용실이 최근 확장을 했다. 이사한 공간을 처음 다녀온 오늘 괜스레 집들이를 한 기분이라 기뻤다. 마치 내친구가 승진한 기분. 내 친구네 집이 부자가 되어서 넓은 평수로 이사간 느낌. 지난번 방문때 인테리어에 신경쓰고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었는데 오늘 가서 구석구석 손길이 가있는 모습을 보고 뿌듯했다. 커가는 가게처럼 나도 커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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