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한 여행들
2009년 5월, 나의 스물한 살.
수도 앙카라에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터키를 돌아 이스탄불에서 나오는 일정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했다.
하고많은 여행지 중 왜 터키를 골랐냐고 하면 언젠가 내가 읽던 책에서 터키의 파란 하늘은 너무나 예뻐서 눈물이 날 정도라는, 뭐 그런 말을 봐서다. 이런 느끼한 말에 왜 그렇게 꽂혔는지는 모르지만, 그 예쁘다는 파란색이 어떤 파란색인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그런 단순한 이유가 다였다. 따뜻한 동남아시아 반도나 못 가본 유럽의 어느 나라들도 생각하면서 자료 조사도 많이 하고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프로도 많이 찾아봤던 것 같은데 계속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 학기 휴학하고 일하며 여행 경비를 마련 중이었고 떠날 날도 정해두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하고 집에 오자마자 충동적으로 터키행 비행기를 끊어버린 것이다. 이 글을 보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무려 11년이나 지나버린 시간이라 기억은 안개처럼 자욱하지만, 또 어떤 순간들은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다. 새벽에 떠나는 앙카라 편 국내선을 타느라 했던 나의 첫 공항 노숙, 이란 국경을 인접한 마을에 갔다가 멀찌감치 나를 구경하던 아이들에게 맞은 서러운 돌멩이들, 고소공포증을 뒤로하고 도전한 패러글라이딩의 짜릿함과 떨림, 너무나 투명해서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던 따뜻한 지중해의 바닷물. 어려서 그랬는지 당시에 했던 경험 모두가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고, 그때만큼 많은 감정을 다채롭게 또 고스란히 느낀 적이 있을까 싶다.
그중 요즘 자주 생각났던 건 카파도키아 괴레메에서 보냈던 그 날. 그 날은 참 이상한 하루였다. 같은 곳에 벌써 사나흘 머물러서 더 이상 새로이 할 것도 없었고 추운 밤과 대조적으로 작열하는 한낮의 태양 아래 쪼리를 끌고 하릴없이 쏘다니던 날. 낯선 외국인 여행자에게 겁 없고 친근한 터키 꼬마들과 기억도 나지 않는 놀이를 하며 놀다가 그 애들의 엄마를 만났다. 머물던 숙소 매니저 정도 빼고는 아무도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 엄마는 터키어로, 나는 한국어로, 손짓 발짓 섞어가며 얘기 아닌 얘기를 했다. 어디서 왔냐, 뭐하는 사람이냐, 나이는 몇이냐, 가족은 얼마나 있냐 (터키 사람들은 가족에 대해 꼭 물어보는 경향이 있다) 등을 물어본 후 여자는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심심하던 차 잘됐다는 마음으로 선뜻 초대를 받아들이고 시간 맞춰 그 집에 나타났는데, 두어 시간의 식사 동안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만 일반 도마 세 개는 이어 붙인 것 같은 엄청나게 큰 도마에 얹혀 나온 거대한 터키식 피자를 배 터지게 먹은 건 생생하다.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어쩌지 걱정했던 것도 무색하게 동네 사람들 절반은 모인 것 같던 커다란 그룹에서 왁자지껄 저녁을 먹느라 피자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애들은 죄다 돌아가며 내 무릎에 앉으려고 하고 헤어질 때가 되니 울고 불고 난리여서, 내가 원래 이 사람들과 가족이었는데 잠시 들렀다 다시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에서 숙소까지는 그곳 지리를 잘 모르는 나에게도 끽해야 걸어서 10분이었으나 어두울 때 혼자서 더듬더듬 찾아가려니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가로등도 잘 없는 시골 마을이라 숙소 매니저가 밤길에 쓸 손전등을 챙겨 줬었는데 어둠에 익숙해지자 조금씩 무서운 마음도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현듯 고개를 들어 본 하늘에는.. 바로 은하수가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반짝이는 많은 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그 가운데를 희뿌연 구름처럼 지나는 은하수.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하는 동요에서만 들었던, 바로 그 은하수가 내 머리 위로 펼쳐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아름다운 장면은 내가 3년 뒤 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에 갈 때까지, 그 이후로는 아직도 보지 못했다. 당장 손전등을 끄고 평평한 길가에 누워 적막 속에서 하릴없이 별들을 바라보았다. 옷이 더러워질 걱정도, 벌레 걱정도 하지 않고 그저 별빛으로 온 눈을 적시며 그렇게 오래도록 누워 우주와 지구와 살아 있는 모든 것과 그 안의 조그마한 나를 생각했다. 오들오들 떨릴 때쯤에야 굼뜨게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했는데, 춥지만 않았다면 동이 트도록 그렇게 누워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밤 덕분에 나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여행할 때 밤하늘을 꼭 살펴보는 버릇을 갖게 되었는데, 은하수는 그렇게 쉽게 또 우연히 나타나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특별히 아름다운 것들이 그런 것처럼.